사단법인 한국불교조계종

 
종단소식

부산 해운대 지장암 정공스님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2-23 10:27 조회1,729회 댓글0건

본문

묘각불지 종지를 밝힌 부산해운대 지장암 정공스님


깨달은 사람은 바람소리 물소리가 모두 부처의 사람이 아닌 것이 없다는 정공 스님. 그는 수행인을 자기의 팔식(八識)이 청정해야 한다면서 아라야식(何賴耶識)을 강조했다. 정공 스님은 “인간은 본래 무일물(本來無一物)인데 팔식의 무명에 걸려 여래지(如來地)가 될 수 없다.”면서 “팔식의 암굴을 소탕하면 생사후탈(生死透脫)한다”고 강조했다.
정공 스님은 “팔식의 무명을 타파하면 묘각불지(妙覺佛知)가 되어 육신을 육신통(六神通) 되고, 오식은 오력(五力)이 되고, 삼독(三毒)은 삼지(三智)가 된다”고 밝혔다.
정공 스님은 인터뷰에서 “진리를 깨닫고 생명을 얻으라, 연꽃을 묻기 전에 연꽃이 되고 연잎을 묻기 전에 연 잎이 되라”면서 “연꽃이란 건강한 정신이요, 연잎이란 건강한 육체다”고 말했다.

나는 나를 만물에서 찾다가
눈 앞에서 바로 주인을 보았네
허허 서로 만나자 의혹 없으니
우담발화 꽃 빛 온누리에 흐르네

我아是시訪방吾오物물頭두
目목前전卽즉見견主주人인樓루
呵가呵가逢봉着착無무疑의惑혹
優우鉢발花화光광法법界계流유

정공 스님은 게송하며 발하되
“아인망처초삼계(我人忘處超三界)
대오진공증법신(大悟眞空證法身)
무영수두화란만(無影樹頭花爛漫)
청산의구겁전춘(靑山依舊劫前春)

나와 남을 잊은 곳에 삼계를 뛰어넘고
진공을 대오하며 법신을 증득하셨네
그림자 없는 나무에 꽃이 찬란하고
푸른 산은 옛과 같이 법 밖의 봄이네.”


정공 스님은 법상에 올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번 굴리고 “4월 15일 결제(結制)하여 7월 보름달에 맺힌 것을 풀어놓으니 납자(納子)가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니 신구(新舊)가 변하였도다.”고 일갈했다.
이것이 맺힌 것인가, 푼 것인가? 이것이 모인 것인가, 흩어진 것인가? 이것이 간 것인가, 온 것인가? 이것이 새로운 것인가, 묵은 것인가?
이것이 변한 것인가, 변하지 않은 것인가?
이 자리는 맺힐 수도 없는 것이요, 풀 수도 없는 것이요, 모일 수도 흩어질 수도 없는 것이며, 갈 수도 올 수도 없으며, 새 것도 옛 것도 없고, 변하지 않는 것도 없는 것이다.
이미 다 없다고 하였으니 필경에 이것이 무엇이겠는가?
정공 스님은 “옛 사람이 이르되 만리(萬里)를 향해 가도 촌초(寸草)가 없이 가라 하였으니, 이것은 촌초(寸草)만한 신념(新念)이 없이 공부를 놓치지 말고 다니란 뜻이니 이 뜻을 알겠는가?” 반문했다.
정공 스님은 수행 납자는 “보고 듣고 깨닫고 앎에 걸림이 없어서 소리를 듣고 빛깔을 보고 맛을 깨닫고 몸에 부딪침을 아는 곳에 항상 삼매를 놓지 말아야 하며 맺는 것도 맺어줌이 아니요, 푸는 것 역시 남이 풀어주는 것이 아니니, 자기 공부는 자기가 잘 자각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자각(自覺)하는 것은 별로 방법이 없어서 득실(得失)과 시비(是非)를 일시에 방하(放下)하여 놓아버릴 수 없는 곳에 이르러서 놓아버릴 수 없다는 것까지 다시 놓아버려야 할 것이다.
이곳에 이르러서 위로는 더욱 잡을 것이 없고, 아래로는 자기(自己)도 없어서 항상 광명이 현전(現前)할 뿐이니 이것을 일러서 안락해탈(安樂解脫)이라고 하겠다.
결제라고 한 것은 법을 맺는다는 말이요, 해제라는 것은 법을 푼다는 뜻인데 대개 4월 15일에 결제하여 7월 15일에 해제를 하는 것이니 이것을 여름 안거라고 하는 것이다.
거(居)라는 말은 결제라는 뜻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결제 중에는 산문(山門) 밖에 나오지 못하고 결제 중에 나다니다가 매를 맞고 죽어도 살인이 안된다는 말이 있다.
결제 중에는 돌아다니지 말고 참선을 하면서 90일 간에 공부를 잘하도록 기간을 만든 것이다. 학교 학생이 개학을 하고 방학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결제와 해제를 선가(禪家)에서는 파주(把住)와 방행(放行)이라고도 한다. 파주(把住)는 마음을 잡아 주(住)한다는 말이요, 방행(放行)은 긴장하였던 마음을 놓아 풀어본다는 것이다.
어떤 공부도 힘이 들고 어렵지만은 불교의 공부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일반 사회학은 날마다 진보되어 가는 이정표(里程標)가 보이지만은 불교의 공부는 형상 없는 마음을 찾는 공부이기 때문에 어디까지 진보가 되고 있는지 그냥 그대로 답보를 하고 있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어려운 것이다.
결제 중의 공부는 꼭 참선만을 말하지 않는다.
선실에서는 좌선을 주로 하지만은, 강원에서는 간경(看經)을 주로 하고, 염불당에서는 육자염불(六字念佛)을 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선·간경·염불은 모두 견성 성불을 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든지 공부를 시작할 때에는 큰 결심과 신심으로써 정진을 해야 되는 것이다.
대개 선(禪)이란 그 이치가 즉 바른 지름길이며 높고도 요원(遼遠)하여 삼승(三乘)을 멀리 뛰어났기에 선을 배우는 이가 본지풍광(本地風光)을 깨달아 사무치면 옛 부처와 어깨를 나란히 함이니 그 법이 긴요하고 묘함이라 무엇이 이것에 지날 게 있으랴. 그러므로 달마 대사가 이 땅에 들어온 이래 우리 동토에 이르기까지 도를 얻어 부처 지위에 오른 이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러 그 도가 황폐하여 전하여지지 않고 설사 발심한 이가 있다 하여도 처음에 참구(參究)하는 법을 결택하는데 힘쓰지 않아서 마침내 혼침과 망상 가운데 떨어져 소용돌이 속에서 일생을 마치면서도 그 이치를 체득하지 않기 때문에 함께 도를 닦는 행업자(行業者)가 잘하고 못한 것을 가리지 않고 그저 비탄만 하니, 오호라 가히 구원할 수가 없도다.
대개 참선參禪이라 함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집안을 돌이켜보는 것과 같다. 또한 바깥세상의 헛된 것에 뒤섞이지 않으며 생사에 어지러이 끌려다니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얽매임도 아니며 벗어남도 아니며 또한 번뇌도 열반도 아니다.
하루 종일 옷을 입어도 한 올의 실도 걸치지 않았고, 하루 종일 밥을 먹어도 쌀 한 톨 먹지 않았다. 재앙이나, 복, 삶과 죽음에 이르러서도 또한 모두 이와 같아서 되는 대로 맡기고도 아무 일이 없나니 이것을 일을 마친 사람이라 한다.
일을 마친 사람은 때로는 부처와 중생, 하늘과 땅과 대지를 부수어 한 티끌로 만들기도 하며, 때로는 저마다 제자리에 머무르게 하며, 어떤 때에는 자리를 바꾸는 등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한다.
이것을 이름하여 부사의대용(不思議代用)이라 하며 또한 자재해탈(自在解脫)이라 이름하나니 생사를 벗어날 것도 없으며 열반을 증득할 것도 없이 마음대로 노닐돼 인연 따라 걸림이 없나니 이 모두 진실되고도 밝고 밝은 한 조각 본래면목이로다.
안락하고 쾌활하며 밝고 묘한 수용이라 생사에 오고 가되 열린 문에 드나들 듯이 천당과 부처님 세계를 뜻대로 하니 꿈같이 헛된 몸과 마음의 괴로움에 속박될 것이 없다.
또한 이것은 본래 있는 그대로라 억지로 만든 것이 아니다.
청컨대 만일 고양이를 그린다면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리라.

 

ca13daf318253f16b4d323ed20c42aa4_1519349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