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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유리광사 월광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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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4-03 18:26 조회1,7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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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유리광사 월광스님
본심을 알지 못하고 법을 공부하면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월광 스님. 그는 “본심을 스스로 알면 본성을 스스로 본다”는 성불의 원칙을 설파했다. 월광 스님은 “붉은 안경을 끼면 모두 붉게 보이고, 푸른색의 그것을 끼면 이번에는 모든 것이 푸른색일 따름이라”고 밝히며, “우리 마음 속에 먼지나 흙이 많이 끼여 있기 때문에 항상, 잡념이 죽 끓듯 일고 있다”고 말했다.


몸뚱이는 보리수나무이고 마음은 거울대이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 때 묻지 않게 하리.

身신是시菩보提제樹수 心심如여明명鏡경臺대
時시時시勤근拂불植식 勿물使사惹야塵진埃애 

 

진정 봄은 해로(海路) 삼 백리 이름도 없는 외로운 섬에 앉았다가 그 섬에 내렸다가 떠나가는 날개 없는 철새다. 봄은 산하를 다녀가며 만물을 약동케 하는 위대한 지휘자, 귀와 눈을 뜨게 하는 총명과 예지를 준다. 봄은 강야(江野)를 꾸며 위대한 채색을 가하는 천연적 화가로서 형형색색의 천자만홍(千紫萬紅)을 점지해 준다. 봄은 진정 연못가에 찾아와서 창포백리를 살찌게 하고 명경지수에 천광운영(天光雲影)을 노닐게 하는 계절이라는 환상에 몰두하다가 시원한 들바람이 피곤함을 달래주는 기운을 느낄즈음, 마침 월광정사 법당에서 들려오는 예불독경소리가 산천초목에게 대광명을 놓고 있었다.
-스님, 유리광사에 오니 겨울엔 들을 수 없었던 자연의 장광설법 소리들이 들려오고 또 느낄 수 없었던 감회들이 저며옵니다.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한결 친근감 있게 들려오고 도량에 빗소리가 소소하게 들리며 초목들의 눈과 잎이 터지고 속살이 살찌는 감로법문 소리가 들려옵니다.
▲ 원래 천지만불은 봄을 소유하고 느끼면서 스스로의 모양을 찬영(燦英)으로 나타내고 또한 봄은 거대한 천지만불을 머금고 융화시킴으로써 만물과 더불어 공생하는 왕도(王道)인 것입니다.
봄은 인간에게 춘곤(春困)을 안겨줍니다. 이 춘곤으로부터 오는 졸음에 의해서 옛 사람들은 위대한 시작(時作)을 했지요, 제갈량이는 촉한시대의 정치가에게 유비가 삼고초려를 해오는 날 자신의 뜻을 이렇게 밝혔다고 합니다.
대몽수선각(大夢誰先覺)인고 평생아자시(平生我自知)라
초당춘수족(草堂春睡足)해서 창외일지지(窓外日遲遲)로다.
큰 꿈을 누가 먼저 깰 것인가 평생 나는 스스로 알고 있었다.
초당에 봄 졸음이 넉넉히 오는데 창 밖의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구나.
- 스님, 대자연 속에 모든 법을 밝히는 무정설법의 뜻이 들어 있는데 답이 나오지 못한 것이 우리 중생들의 삶입니다.
대자연의 법문을 듣고 확연명백하게 깨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중생들이 호리만치도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어서 모두다 원각묘심을 쫒아서 대자재와 대무애와 대원명과 대활발의 그러한 사중득활(死中得活)의 경지를 얻는 대자연의 선지를 한번 더 부탁드립니다.
▲ 춘면불각효(春眠不覺曉) 어늘 처처문제조(處處聞啼鳥)라
야래풍양성(夜來風兩聲)에 화락지다소(花落知多少)라
봄날의 늦잠이 곤하기도 하며 날 샌 줄도 모르고 자고 있었네.
새들은 먼저 일어나 지저귀고 밤사이 불던 바람 때문에
뜰 앞의 꽃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마음 속으로 늦잠을 잔 것이 새들에게 부끄러웠으나, 그래도 얼른 몸이 일어나지를 못하는 개인의 안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시(詩)입니다. 그냥 누워서 생각하기를 초저녁부터 약간의 바람을 동반한 춘풍춘우(春風春雨)에 의해서 일전부터 봄을 알려준 도리(桃李)들이 그대로 붙어 있을까 하고 애석해 하는 이른 봄날 아침의 초당 정경이 눈에 선한 도심(道心)을 밝힌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법이 이해관계에 얽힌 유위법인데 월광 스님의 가슴엔 현실을 초탈한 무위법으로 자연의 생명력과 불교의 근본을 알고 사는 혜안과 깊이의 세계를 명쾌히 말했다.
- 천지만물은 다 자연으로부터 음력과 은총과 불은과 자은(慈恩)을 받아서 진화되고 변화되고 생성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스님, 대자연이 법당이 아닌 것이 없고 청정자연이 정법안장과 열반묘심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아 가며 살아야 실상무상(實相無相)의 도리를 깨친다고 하던데요.
▲ 산천초목은 시은(施恩)을 입고 움트고 자라나서 꽃피우고 열매맺고 숙살(熟殺)되니 이것이 바로 빚을 갚는 것이며 난생, 습생, 화생, 태생이 모두 생겨나고 이루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보은을 하는 것입니다. 태생(胎生)으로 생로병사를 하고 마는 우리 인간도 나름대로 잘났건 못났건 선하든 악하든 간에 보은의 대가를 반입(反入)하고 가는 동물입니다.
잘난 사람은 못난 사람과 비교해서 잘난 그 자체로 보은하는 것이며, 못난 사람은 못난 그 자체로 잘난 사람에게 그를 돋보이게 해 주기 때문에 보은하는 것이며, 선한 사람 역시 악한 사람에게 선한 것이 뭐다 하고 그 가치를 보여주기에 그것이 곧 보은하는 것이며, 악한 사람의 악행 그 자체도 악행 때문에 선을 나타나게 해 주기 때문에 악행으로 보은을 하는 것입니다.
추(醜)와 미(美)가 공존하고 선과 악이 상생하는 것은 우주원리의 입장에서 볼때 태극의 음양처럼 서로의 해결점을 찾아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은 천지자연으로부터 생명과 형체를 부여받았고 성인으로부터 교훈을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은 자연의 조화공(造化功)에 보은을 드리고 성인의 인간성 가피력(加被力)에 보은하고 부모님의 낳아 길러주신 은혜에 보은을 드리고 나의 삶을 도와주는 상생상극의 공에 보은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한량없는 빚을 짊어지고 태어나므로 유가에서는 입신행도(入身行道)가 보은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불가에서는 성도제중(成道濟衆)을 보은하는 최상책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스님 ‘반야심경’에 나오는 저 유명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생(空卽是生)의 색(色)과 공(空)은 무엇입니까?
▲ 색즉시공(色卽是空). 색(色)이라, 여기서 말하는 색(色)은 탕남탕녀들이 좋아하는 그 색이 아니라 만물만상 즉 삼라만상 바로 그것을 뜻합니다. 공(空)이란? 모든 것이 텅 비었다는 것이 아니라 공(空)의 본뜻을 ‘반야심경’에 불생불멸, 불구부정, 무시무종 그리고 상주불멸로 요약해 놓았지요. ‘생겨나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처음도 끝도 없으며, 언제나 있고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공(空)은 그리스도의 성령, 도교의 도(道) 힌두교의 브라만처럼 벌써 시공을 벗어난 절대적인 ‘그 무엇’입니다.
- 그렇다면 공(空)은 체(體)로서 본체(本體)를 말하고, 색(色)은 용(用)으로서 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옛날 선객들은 진공(眞空)은 공이요, 묘유는 바로 색이라면서, 진공은 마음, 즉 법신불, 모유는 즉 화신불(化身佛)로 진공무유(眞空無有)의 참 뜻을 비유했는데 진공묘유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 공은 체로서 법신불이요, 색은 용으로서 화신불입니다.
비유하건데 옛날 소동파 시인이 기고만장했는데 옥천사 승호 스님과 귀종사 불인 선사들을 차례로 만나고 난뒤 사람이 확 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그렇게 뻐기던 학문이 한 치 한 푼의 가치가 없다는 걸 뼈져리게 느꼈지요. 공부란 “아는 데 있지 않고 모든 생각을 쉬어 나가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소동파는 황룡사 절에 상층선지식에게 묻기를 “원컨대 미(迷)한 중생에게 한 법을 내려주십시요”하고 간청했다. 상총 스님은 “대관(大官)은 어째서 무정설법(無情說法)은 듣지않고 유정설법(有情說法)만 청하시오?”
소동파는 이 말을 듣고 그만 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자리를 물러나와 말을 타고 무정설법만 생각하면서 굽이굽이 첩첩산골을 돌아 몇십 리 길을 왔는지 몰랐다. 오직 무정설법이란 의심덩어리만 가슴 속에 사무치게 안고 자기 몸뚱아리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마저 잊고 있었다. 그때 돌연 계곡에서 흘러 내려온 벽간수가 낭떠러지로 쏴- 쾅! 쾅!…, 골 안을 뒤흔들며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 순간 3천대천세계가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의심덩어리의 알음알이가 일시에 깨져버렸다.
확철대오의 순간이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삼층선사가 계신 곳을 향해 두 손을 맞잡고 진심으로 배례한 뒤 득도게승을 송(頌)했다.
“계성편시장광설(溪聲便是長廣舌) 산색기비청쟁신(山色豈非淨爭身)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
깊은 골 시냇물 소리는 부처님 말씀, 높은 산 그 모습 어찌 부처님의 몸 아니랴. 밤새 들려오는 진리의 말씀을, 뒷날 다른 사람한테 어찌 일해주랴”

▲ “심생만법(心生萬法)이면 만법유심(萬法唯心)이 일체만법원시자성소견(一切萬法元是自性所見)이라(마음이 만법을 내고 만법은 오로지 마음이며, 그리고 일체만법은 원래가 자선의 표현이라).”
혜능 대사가 처음 깨달았던 게송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되겠다고 생각한다면 먼저 무명을 끊어야 하며, 이 무명이 곧 견사번뇌를 일으켜 견혹과 사혹에 끄달리게 됩니다.
정(情)에도 애(愛)에도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정애에 머문다면 이게 바로 무명이며 또한 생사입니다. 정에도, 애에도, 유(有)에도 그리고 공(空)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 중도(中道)입니다.
이때 유(有)도 공(空)을 떠나지 않으면 정애 그 자체가 참된 반야가 됩니다. 이를 두고 깨달음(覺), 그렇지 않으면 어두움(迷)입니다. 각(覺)과 미(迷)는 오로지 몸 한번 돌림의 공부입니다. 그래서 회두전면(回頭轉面)이라 합니다.
우리는 현재 지금 그 모양 그 모습대로는 부처는 아니지만 부처가 될 자격은 차별 없이 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육도(六度)를 돌아다니는 윤회의 사슬을 끊으면 마음의 진면목인 자성을 보아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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