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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불교조계종 유리광사 주지 법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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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6-02 10:29 조회1,3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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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불교조계종 유리광사 주지 법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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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부처인가?
중생이라는 씨앗을 자비의 물로 키워서 그 열매가 익는 것이다”
‘나’라는 집착을 벗어버리고 단 1초를 염불하더라도 지극 정성으로 한다면 그 1초가 바로극락이 됩니다.
보살님들, 처사님들이 앉아서‘이뭣고?’하며 화두를 들고 공부합니다. 그런데 ‘이뭣고? 화두를 오래 하다 보면 다리도, 무릎도 아프고, 관절염도 오고, 혀도 바짝바짝 마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업을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이뭣고?’ 화두는 우리나라에 생긴 지 얼마 안 됩니다. 육조 대사 이전에는‘이뭣고? 화두가 없었어요. 제2의석가라고 말하는 마명 보살, 용수 보살은 전부 염불을 권했습니다. 그리고 원효 대사, 무학 대사, 서산대사, 사명 대사모두 염불을 권했습니다.
‘무자(無字) 나 ‘이뭣고?’나 모든 화두가 다 일체 유루적(有漏的)인 상대유위법을 떠나서 오직 불심만 잡으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공안이나 염불이나 모두 다 같은 것입니다. 염불도 부처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행복한 극락이 십만억 국토 밖에 있다고 생각할 때에 방편이 되는 것이지만,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요 만법이 본래 부처일 때는 그것이 바로 선(禪)인 것입니다.
염불은 부처님 당시부터 염불(念佛),염법(念法), 염승(念僧), 염계(念戒), 염시(念施), 염천(念天)이라고 해서 경전에다 나와 있습니다. 또한 원래 우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또 부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염불은 내가 참 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선(禪)이 됩니다.
그런데 깊은 고려 없이 염불은 하근기(下根機) 중생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외도들이나 하는 것이라 말해 버린다면 문제가 큽니다. 보살님 중에 육념(六念)을 헤아리면서 애쓰고 몇 십년 동안염불한 분도 어느 스님이“염불은 근기가 낮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기에, 화두를 해야 한다. ”단순히 말해버리면 염불을 그만두고서 억지로 화두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시간낭비인 동시에 병통이 생기기 쉬운 일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라 생각하고서 노력하면 되는 것이지, 섣부른 법문은 소경이 길을 인도하는 격입니다. 염불과 참선은 본래 둘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같이 닦을수록 좋다고 영명연수 선시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것을 명료간(皿料揀) 이라 합니다.
有禪有淨土(유선유정토)
猶如戴角虎(유여대각호)
現世爲人師(현세위인사)
來世作佛祖(래세작불조)
참선과 염불이 있다면 마치 이마에 뿔달린 호랑이같이 현세에는 여러 사람들의 스승이 되고 래세에는 부처나 조사가 될 것이로다.
無禪有淨土(무선유정토)
萬修萬人去(만수만인거)
但得見彌陀(단득견미타)
何愁不開悟(하수불개오)
참선 없이도 염불이 있다면 만 사람이 닦으면 만 사람 모두 왕생 하리니다만 아미타부처님을 뵈옵게 된다면, 어찌 깨닫지 못할까 근심하리오.
有禪無淨土(유선무정토)
十人九蹉路(십인구차로)
陰境若現前(음경약현전)
瞥爾隨他去(별이수타거)
참선을 하고 염불이 없다면 열명 중에 아홉명은 길을 잘못 들게 되니 만약 임종시 저승세계가 나타나면, 순식간에 끌려가 버리게 되고 말 것이로다.
無禪無淨土(무선무정토)
鐵床竝銅柱(철상병동주)
萬劫與千生(만겁여천생)
沒箇人依悟(몰개인의오)
참선과 염불이 없다면 지옥의 쇠 침대와 구리 기둥을 껴안고서 수억만 겁, 수천만 생을 지나도록 믿고 의지할 사람하나도 없으리로다.
이처럼 염불과 참선을 함께 하면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으로 뛰어난 공덕이 있습니다. 그런데 염불을 외면하고 의심만을 찾으면 그것이 집착이 되어 피가 탁해지고 다리가 뻐근해 집니다. 20년,30년씩 잘못 참신한 보살들을 보면 얼굴이 푸르죽죽하고 성질이 괴팍스러워요. 그것은 수행을 잘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은 일체의 자비를 설한 것입니다. 「능엄경」에 말씀하시기를 ‘제불출세(諸佛出世)는 본위도생(本爲度生)이요, 도생홍원(度生弘願)은 본유대비(本由大悲) 했습니다. 즉,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은 그 근본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요, 중생을 제도하는 큰 원은 그 근본이 대자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법문입니다.
무엇이 부처인지 아십니까? 중생이라는 씨앗을 자비스러운 물로 키워서 그 열매가 익은 것을 부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중생이 없는 데서 부처가 날 수도 없고, 또 자비스러움이 없는 데서 부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비로워야 그것을 불성광명(佛性光明)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불제자는 모름지기 자비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염불은 타력신앙이 아니라 절대로 자력신앙입니다. 여러분들의 본 마음이 아미타불입니다. 하심(下心)하는 마음을 가지고 남의 아픔을 아파해 줄때 밝은 빛이 나오는데, 그것이 아미타불입니다.본 마음은 아미타불인데 업으로 인해육신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계곡물은 자기 업으로 인해 추위를 만나면 얼음으로 변하고 바람이 불면 거품으로 변하지만물의 본질을 잃지는 않습니다.
그처럼 탐심과 치심으로 마음이 좀 더러워졌다고 해서 본래 가지고 있는 부처성품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변모된다 해도 우리의 불성에는 번함이 없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부처인데, 업에 가려서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아미타불은 이처럼 내 몸에서 나투는 것이지 다른 곳에서 나투지 않습니다. 다만 화내고 욕심내는 이 마음에 아미타불이 가려서 안 보이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아미타불인데, 아미타불이 아미타불을 찾는데 왜 염불을 타력(他力)신앙이라고 합니까? 나는 경전의 말을 풀어서 하는 것입니다. 경전 한 구절, 한 구절마다 부처님의 입김이 닿아있음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본질을잃지 않는 것, 이것이 수처작 입니다.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는 염불, 이것은 엄연히 자력신앙인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 자체가 부처이며 내 가족이 부처이고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부처인데, 어디서 부처를 찾으려고 합니까. 부처란 자신의 몸에서 나투는 것이기에 나무아미타불을 간절하게 부르다 보면 업장이 소멸되고 종래에는 해탈하게 됩니다. 해탈, 즉 니르바나는 점점 작아져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음을 말합니다.
즉, 무아가 해탈인 것입니다. 염불 할때는 구하는 바 없이 염불해야만 진정한 기도이자 참선입니다. 구한다는 것은 내주위에 ‘나’라는 울타리를 쳐놓은것과 같으며, 나만은 잘 되어야 한다는 생각의 밑바탕에는 너라는 상대가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집착을 벗어버리고 단 1초를 염불하더라도 지극정성으로 한다면 그 1초가 바로 극락이 됩니다. 염불을 잘하면 마음이 고와지고, 피도 맑아지며, 무릎도 안 아프고, 어깨도 안 아픕니다. 속으로는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게 되면 칭명하는 공덕은 있을지라도 우리가 바라는 성불은 멀기만 하겠지요. 항상 자비롭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수행의 근본이 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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