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한국불교조계종

종단소식

한국불교조계종 중흥사 서경스님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1-10-08 12:16 조회980회 댓글0건

본문

db7160fa3de224f3278d654168c8a48a_1633662 

 

한국불교조계종 중흥사 서경스님

**************************

도(道)란 무엇인가? 도란 구경(究境)이라는 뜻이요, 번뇌를 끊어 없앤 덕(德)을 말한다. 그러나 번뇌를 끊어 없애는 것과 번뇌를 내지 않는 것과는 구별된다. 번뇌를 끊어 없앰은 이미 번뇌가 일어난 것을 끊는 것을 말함이요, 번뇌를 내지 않는 것은 번뇌가 일어나기 전에 번뇌를 막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전자는 지나간 것을 바라보고 하는 말이어서 그 뜻이 아직 부족하여 보살이라 말하고, 후자는 뒤에 있는 결과를 바라보는 말이어서 그 뜻이 구경이다. 번뇌가 일어난다 없어진다를 붙일 수 없고 번뇌를 끊어 없애는 것을 열반이라 이름하지 아니하고 번뇌를 내지 아니하는 것을 열반이라 이름한다.
열반에는 사덕(四德)이 있으니 그것은 곧 상(常)·낙(樂)·아(我)·정(淨)을 말한다. 상이란 무엇인가. 인간들은 색신인 현상계의 끊임없는 생성 변화를 보고 무상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무상함에 집착하여 인간은 무상하다고 하며 허무한 생각을 갖게 되고 그 허무한 생각에 의해서 주관적인 결단으로 인한 대립과 투쟁을 일삼는다. 더구나 무상에는 연속적 ‘이음’이 없기 때문에 책임성이 없으며 찰라적 인생에 전적으로 자기를 내던지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상은 말함으로 변하지 않는 세계, 끊임없이 연속된 세계가 있으니 스스로 낳고, 죽음에 매어달려 허망하게 헤매지 말라는 것이다. 그 세계가 곧 법신세계로 항상 있는 것을 말한다.
낙이란 무엇인가? 모든 살고 죽는 것이 고라고 보는데 대하여 낙을 말한다. 우리 인생을 보더라도 확실히 태어남이 있고 죽음이 있다. 아무리 오래 산다해도 100세를 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언젠가 우리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고 그렇게 될 때 ‘나’란 고통 뿐이다. 낳고, 병들고, 죽는 것은 확실히 고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은 삶의 면에서 보면 사라지기 때문에 죽음이지만, 죽음 면에서 보면 그것은 생의 새로운 탄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데 한 면만 보는 데서 일어나는 착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고는 열반의 뜻으로 낙이 되는 것이다.
아란 무엇인가? 아란 중생들이 자아를 부정하고 나를 믿지 못하고 버리고 있기 때문에 아라 말하고 그것이 곧 불이다. 겉으로 나타난 모습은 가지각색의 중생이지만 그 껍데기를 벗기고 보면 불이다. 생명심의 번뇌·망상이 사라지면 그것은 영원히 나이요, 부처이다.
정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자기 속단의 늪 속에서 언제나 더럽고 탁하다고 본다. 그러나 본성은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 그러나 깨끗하다도 말하고 그것은 법의 뜻이다. 법이란  더러운 것이 아니다.
열반은 곧 부처성품을 봄으로써 얻는 것이다. 올바른 깨달음이란 곧 무상, 고, 무아, 부정이라는 착각을 버리고 진정한 상, 낙, 아, 정을 얻음에 있다. 물론 이때 상, 낙, 아, 정을 관념적으로 집착하면 그것은 이미 상, 낙, 아, 정이 아니다. 무상을 지양하여 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대비행을 닦아야 하고, 고를 없애고 낙을 얻기 위해서는 삼매행을 닦아야 하고, 고를 없애고 낙을 얻기 위해서는 삼매행을 닦아야 하며, 무아에서 아를 얻기 위하여서는 반야를 닦아야 하고, 부정에서 정을 얻기 위해서는 신심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결코 해탈은 모두를 놓고 떠남이 아니다. 그 떠남에서 다시 돌아와 진정한 나와 세계를 보는 것이다. 해탈은 포기가 아니라 다시 재생함이다. 열반은 죽음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이면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믿음은 과연 올바른 것이었던가 하는 점을 다시 반성하게 된다. 우리는 열반 즉 해탈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 마음의 적멸 곧 삼매와 반야와 신심과 대비행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반야나, 삼매, 신심, 대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그것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이러한 것은 동과 정에서 다같이 닦아야 하는 데 그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은 없는가? 우리는 이제까지 불교를 관념적으로 생각해 온 과오는 없지 않은가? 불교는 결코 관념적이 아니다. 하나하나가 전체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전체는 하나하나 속에 포용되어 대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나가 이루어지면 전체가 살아나고 전체가 살아나면 하나하나가 그 개성을 살려 원음(圓音)을 낸다. 그러한 실천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이 곧 보현보살의 행원이다.
모든 중생을 부처로 보는 것이다. 우리는 말한다. 겉으로 나타난 모습이 중생인데 그것을 어떻게 부처로 보는가? 그렇다. 만약 이 세상에 모두가 처음부터 부처로서 보아 하나로 본다면 무엇 때문에 나와 너의 구별이 있었을 것이며 세상이 존재해 있었을 것인가? 겉모양이 다르기에 부처가 있는 것이요, 세계가 있게 되는 것이다. 겉모양은 모두 다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겉모양이 진정한 개아(個我)로서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본성이 부처임이 드러나야 한다. 겉모양을 보고 그 겉모양에 집착하지 말고 그 본성이 부처임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겉모양이 탐내고, 미워하고, 어리석으면 그것이 중생이고 그것은 겉 껍데기로서 언젠가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야 하고, 그 껍질에 매달려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껍질이라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것이 곧 모든 중생을 부처로 보고 예배하고 공경하는 길이다.
모든 부처를 예배하고 공경하라고 할 때, 살인하고 폭행한 사람에게도 예배하고 공경하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 사람에게도 예배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그 죄를 깨우치게 하고 참회하게 하는 것이 곧 그에 대한 공경, 예배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 속에서는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그것은 이미 예배, 공경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찬탄하는 것이다.
이때의 찬탄도 역시 그의 불성을 찬탄하는 것이다. 잘못된 점은 보지 않고 잘한 일만 보고 그것을 찬탄하는 것이다. 참회와 공양, 항상 중생을 수순하고 마침내 회양하는 것이 올바른 실천이다.
이와 같이 대비심을 일으켜 구체적으로 중생에게 수순하는 것이야말로 관념적 실천을 뛰어 넘는 행원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때 우리의 마음가짐은 형상을 떠나야 한다. 형상인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떠날 때 보리심이 일어나는 것이요, 그것으로 인하여 힘을 얻어 행원을 하는 것이다. 실천의 길은 그밖에 보시, 계행, 정진, 인욕 등 많은 길이 있지만 우리는 보현행원의 길을 선택한다. 그것은 관념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