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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국불교조계종 수암사 장운당 운산 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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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9-08 14:17 조회1,7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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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운수납자와 불자들은 대 자유인의 무애행자

운산스님을 통하여 말로만 무애로 말하지 말고 진정한

너와 내가 하나가 되고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고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어 우러나오는 저 높은 원음의 복고를 올리자

 

 

천년고찰 수락산 수암사 / 총무원장 장운당 운산 대종사
H.P : 010-5432-0108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4동 산 154-1 (사단법인 한국불교조계종 )

 

 

운산스님의 참선 수행가풍

운산스님의 수행가풍은 불사불조였다.
오직 생사의 일대사 인연을 탐구하여 참으로 발심의 근원처를 찾아 이제까지 그가 가지고 있고 익혔던 모든 지식이 한낮 그림자와 휴지조각임을 깨닫고 손때 묻은 모든 책은 태워버렸다.
그의 발심은 진실한 것이였고 따라서 종래의 모든 알음알이를 내던져 버리고 일대사 인연의 화두가 은산철벽이 되어 용맹정진했다.
스님은 일정한 곳에 머물지 않고 두타행으로 식음을 전폐하시다시피 오직 이 의심덩어리를 알음알이의 꾸밈이 아니라 온몸으로 부딪히고 있던 어느날 한 사미승이 수좌들과 말하는 가운데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라는 말을듣고 크게 깨쳐 오도송을 읊었다.

 

문득 사람에게서 고삐뚫을 구멍이 없다고는 말을 듣고
문득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 삼라만상이 내 겁일세
7월 수락산 산상에 몇 조각 구름이 옛 절에 어려있고
묘각은 적조하고 등각은 조적하여 연꽃이 만개 하구나

 

운산스님의 화두는 사구(死句)가 아니라 곧 활구(活句)였다.
의심덩어리의 화두가 아니라 화두 자체가 그 자신이 스스로 되었던 것이다.
교언영색으로 육단심의 화두가 아니라 천연적으로 온몸에서 발산되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의심과 대분심과 대신심이었다.

 

운산스님의 화두수행, 즉 참선 공부의 방법은 어떠했는가?
운산스님은 먼저 “대저 참선하는 사람은 무상이 신속하고 생사의 일이 큰 것임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했으며 “오늘은 비록 보존하나 내일은 보존이 어렵다”고 했다.
즉 오직 정신 바짝차리고 조금도 방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운산스님은 “참선하는 사람은 온갖 세상일에 조금도 간섭하는 뜻이 없이 오직 적연무위 해야한다”면서 “그 아픔을 텅 비워서 깨끗하고 순일하여 흔들리지도 않게하고 혼비하지도 않게 해서 허공과 같이 걸림이 없이 해야한다”고 했다.

다시말해서 “머물고 앉고 눕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회광반조(廻光返照)하며 언제나 화두를 들어오고 들어감에 의심해가 되 살피고 다시 관하여 갈고 다시 닦아서 세간의 온갖 번뇌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 이렇게 공부하기를 날이 오래가고 달이 길으면 절로 깨달음에 합하리라”고 말했다.

운산스님은 회광반조를 관념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생각이 일어나는 그 자리에 곧 “무자”화두를 드는 그것이 곧 회광반조요, 그것이 곧 살아있는 화두를드는 행물이라“고 밝혔다.
운산스님은 막연히 무자(無字) 화두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생각 떠오를 때 곧 그 자리에서 “무자를 들면 그것이 또한 회광반조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면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사에 마음이 없게 무심어사(無心於事)하고 마음에 일이 없게 무심어사 하여야 한다”고 했다.

 

육바라밀에 대한 선적(禪的)인 이해와 보시행

운산스님의 육바라밀에 대한 해석은 전혀 교학적인 것과 다른 것이있다. 그의 육바라밀 해석은 선적인 것과 보시행 실천이다.

그는 말하기를 “만일 일용의 만행을 논하자면 가슴속이 비고 밝아서 아무것도 없으며, 육근이 텅 비어서 다만 너그럽고 빈 그 자리가 이 보시(布施)며, 다만 저 깨끗하고 말쑥한 것이 곧 이 계(戒)<持戒>를 지니는 것이며,

다만 이 비고 부드러운 것이 곧 이 욕(辱)을 참음(忍辱)이며, 다만 저 본래 밝은 것이 항사 드러나서 어둡지 않은 것이 곧 정진(精進)이며, 다만 저 밝고 고요하여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선정(禪定)이며 다만 저 밝고 고요하여 분명하여서 법을 가려내어 공(空)을 관(觀)하되 본래 스스로 어리석음이 없으며, 모든 법을 분별하되 움직이지 아니하며, 이렇게 세간으로 수순하되 걸림도 없고, 믹힘도 없는 것이 문득이  지혜이다”고 했다

즉 청정자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육바라밀이며 즉 오(悟)가 육바라밀이라는 것이다.


선과 염불의 일치된 수행정진

운산스님은 참선을 규정지어 말하기를 “대처 참선이라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자가(自家)의 옥리(屋裏)를 반조(返照)하고 자기의 주인공을 명백히 하여 바깥 경계에 끌려가지 않으며, 생사에 뒤바뀜이 되지 않고 초연히 뛰어나서 분명히 드러나며, 평탄하게 트이어서 무엇에 얽매임도 아니며, 벗어남도 아니며, 번뇌도 아니며 열반도 아니다”고 밝혔다.

이러한 참선과 염불은 어떻게 다르고 같은가? 일반적으로 참선은 자력문이요 염불은 타력(他力)문이라고 말하는데 대하여 그는 이 둘을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밝혔다.
즉 “ 차력은 나무를 심어서 배를 만드는데 비유하고 타력은 배를 빌려서 바다를 건너는데 비유함이니 더디고 빠르고 어렵고 쉬운것의 공효가 다름이 있다는 말이 있으니 이것도 또한 사람을 권하여 교화하는 방편이다”라고 말하면서 이 둘이 하나임을 가리켜 말하기를 “본래 뿌리없는 나무가 있거나 어찌 심기를 기다리며 본래 밑 없는 배가 있거니 어찌 만듦을 기다리려오 대천 세계를 두루 덮고 인간 천상을 널리 건짐에 그 도와 그 작용이 일찍이 조금도 모자라지 않건마는 다만 어지러움증이 안정되지 않고 혼미한 꿈을 깨치 못할 따름이다”하였다.

나아가 참선과 염불문이 둘이 아님을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하여 말하기를 “성성적적(惺惺寂寂)을 평등하게 가지면 반드시 견성할 것이요, 염불문 가운데 한 마음이 어지럽지 않음과 성성적적을 평등하게 가짐과는 하나이다. 따라서 참선문이 자력이라면 염불문도 자력이요, 염불문이 타력이라면 참선문도 타력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운산스님은 “그러기 때문에 자력,타력을 구별할 수 없고, 다만 마음에 산란이 없게 염불하면 그것이 자력이 되고, 화두를 든다 해도 산란과 혼침으로 든다면 그것은 오히려 타력도 되지 못한다. 따라서 참선과 염불은 마음을 성성적적하게 하고 산란하지 않으면 하나이지 둘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운산스님의 자연사랑과 서정의 찬미

夜聽風流後松  야청풍류후송
晝看雲起前山  주간운기전산
雲山相見呵笑  운산상견가소
一片雲繞靑山  일편운요청산

밤엔 바람소리와 솔잎소리
낮엔 앞산에 피어오르는 흰구름 자락
운산은 마주보고 껄껄웃으며
한줄기 조각구름은 청산을 들러 흘러가네

藏雲堂 雲山 作

 

우리는 운산스님의 서정의 노래를 선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아마도 운산스님의 자연사랑에 대한 찬탄도 역시 선시적 세계로 높여 평가한데서 나온 말일 것이다.
스님의 시적 소재는 무한한 대자연 전부가 하나하나 소재를 이루고 있다. 산과 강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구름, 물과 나무 귀뚜라미, 봉선화, 초생달 가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모두 선시의 소재가 되고 있다. 이러한 자연의 합창을 벗어난 선시로서는 시색(時色)이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모두가 인생과 동체대비와 육바라밀 실천에 대한 관조에서 나온 선시들이다.

 

인생이란 뜬 구름 같은 것 나그네 길이다
장가(張哥)는 누구이며 조가(趙哥)는 누구더냐?
안다는 사람 손꼽아 보니
살아 남는 이 그 몇이더냐?
젊다 늙다 논하지 말라
황천 가기는 매일반이니
몸으로 일찍 깨달음을 돌이켜
크게 급할 뿐 주저하지 말라
<제행무상 편>

 

얼마나 인간적인 속삭임이냐, 마치 사랑방에 앉아 참선을 하는 초연한 할아버지가 숨가쁘게 들어 온 동네 노총각을 향해 한마디 하는 듯한 그러한 목소리로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산다고 하루종일 뛰어다니는 현대인들에게 인생이란 믿을것이 없다. 죽음의 황천길은 높은 이, 작은 이, 귀한 이, 천한 이, 모두가 동창생인데 왜들 야단이냐, 어서 죽음의 동창생을 깨달아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 되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타이르는 것이다.
이제 다른 종류의 법을 통해 그의 인생을 반면교사로 조명해 보자

 

가을날 귀뚜라미 소리 소소히 들리는 수락산 자락
베개머리 가을달 휘영청 비치는 무상한 삶이여
스산한 바람에 낙엽은 절 뜨락에 겹겹이 쌓일제
하루살이 한 세상 돌아다 보니 일장춘몽 한바탕 꿈일세

 

인생을 관조하는 듯한 시구(詩句)들이다. 가을 낙엽을 보고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면서 사람의 한 평생을 돌이켜 본다. 무상한 인생 덧없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시름만 점점 더하나. 이러한 운산스님의 시를 보면 불꽃이 튀는 듯한 절박함이 있고 때로는 가슴에 못을 치는 듯한 캄캄한 절벽이 부딪치지만 운산스님의 시 속에는 그러한 긴장감이 오히려 한 소식 끝나고 일을 놓을 듯한 분위기가 있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선의 세계이요, 그의 독특한 선사의 시심을 초연히 노래하고 있다.

그는 초탈한 장자의 세계가 넘쳐 흐른다. 모든 것을 한 차원 높이 보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 보는 관조의 품위가 있으면서, 부드럽기가 한이 없다. 인간적 너무 인간적인 향기가 넘쳐 흐른다. 선의 긴장 속에서 “휴머니즘”이 풍기는 이유가 있고 한가함이 있다.
심우가에서 학의 다리가 비록 길지만 자르려 하면 근심이 되고,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지만 이으려 하면 걱정이 된다,라는 장자의 연무편(聯拇篇)의 말을 대중법문에서 인용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장자를 좋아했는지 알만하다.
운산스님의 자연에 대한 관조는 이미 직관적 체험을 통해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님을 보았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것을 깨달은 그는 모든 것을 대립과 차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는 다른 것 속에 같음을, 같음 속에서 다름을 인정하는 데 화해(和諧)의 세계를 보았던 것이다.

운산스님의 자연에 대한 세계는 태산준령에 올라 밑에 깔린 구름을 보는듯한 일 마친 이의 환희 속에서, 저 삶의 세계를 관조하며 자유의 노래를 부르는 풍경과 같았다. 그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넉넉하게 하는 친근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소유물을 망아적 초월적인 힘으로 베풀어 절망적인 중생을 구제하고 있다. 이것이 운산스님의 수행가풍의 행원 실천이다.

 

세상이 혼탁하면 현인(賢人), 우인(愚人), 군자(君子)와 소인(小人),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구별이 어렵다. 이러한 시대에는 언어와 문자를 통한 설명과 설득이 모두 그 힘을 잃는다. 심안하는 자 없어지고 오직 실리와 기교로 야합하여 세상을 더욱 구렁텅이로 몰아 넣을 뿐이다.
운산스님은 무엇에도 걸림 없는 무애행자(無碍行者)였다. 그러나 그 무애행은 자비의 극치에서 어떤 것에도 집착이 없는데서 그저 자연히 나타나는 행(行)인 것이다. 물질의 소유욕에서도, 감각의 촉각에서도, 부드러운 목소리, 맛있는 미각에서도 전혀 영향 받음이 없이 순수한 마음 자체에서 나오는 행(行)인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행(行)한 행위의 결과에 대한 보답을 요구함이 없이 전적으로 무소유의 그저 주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行)이었다.

이제까지 스스로를 옭아맨 지식, 윤리, 인간관계, 알고 모르는 일체의 껍데기를 홀랑 벗고 순박한 토지에서 자생되는 것이다. “나”라는 고정관념이 완전히 해체된 경지에서 일월(日月)과 같게 비치는 조명이다. 누구의 간섭도, 누구의 지시도, 다시 말하연 마음의 지시도, 육체의 지시도 받음이 없이 순수 그 자체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행위이다.

운산스님과 같이 걸림없는 무애인이 있었기에 참다운 불교의 진수를 깨닫게 되는 것이요, 무명의 길목에서 헤매는 중생들에게 영원한 고향을 확인시켜 주기도 하는 것이다.
운산스님의 저 현실을 초월한 자유자재의 세계 일체의 가식과 허구를 벗어던진 적나라한 삶은 우리에게 새로운 한국불교의 희망과 삶의 즐거움을 던져 준다. 정말로 세상을 향해 한 번 크게 웃어 볼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이다.
운산스님은 오늘날과 같이 배금주의에 팽배되고 물질에 집착되고, 사상에 오염되고, 전도몽상에 허망하게 지내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무소유를 보여주는 위대한 살아있는 광명이다.

이제 우리는 대 자유인의 운산스님을 통하여 말로만 무애로 말하지 말고 진정한 나와 네가 하나가 되고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고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어 우러나오는 저 높은 원음올 올려야 하겠다.
<윤기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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