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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자리는 무심과 유심을 초월한 자리 안양보현정사 마하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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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3-05 18:43 조회1,2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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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보현정사 마하스님

본래자리는 무심과 유심을 초월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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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떤 학자와 선지식들은 나를 깨치기 까지는  그렇게 해야 되지만 사실 깨치고 나면 ‘나’라는 것조차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가면 가고, 오면 오고, 자면 자고, 가면 갈뿐이며, 하면 할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함축하면 무심(無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본래자리는 무심과 유심을 초월한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무심에 빠져 있으면 무기공(無記空)이며 혼침(昏沈)이기 때문에 무심과 유심을 초월하여 함께 쓰고 누리는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아무런 의미가 없다든지 아무 생각이 없다든지 하는 말을 합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다 보면 이는 나무토막에 지나지 앟습니다. 하지만 본래의 나는 이렇지 않습니다. 무엇을 보든지 본 대로 느낌이 있으며 생각이 일어나고 가만히 있다가도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며 꼭 무엇인가를 해야 됩니다. 이렇게 나는 언제나 깨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항시 우리는 무심과 유심을 초월한 ‘나’가 무심과 유심을 같이 쓰는 입장이 되어 바르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공부가 되어도 분명히 나를 제대로 볼 줄 알아야 올바른 견처(見處)를 갖고 견행(見行)을 할 수 있으며 성품을 볼(見性)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항상 모든 것을 초월하여 지금 이대로 깨어있는 것이 본래 나의 부처 자리이며 성품자리이며 그 자리가 바로 불성자리, 진여자리, 실상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일체가 오로지 나라는 것이 분명히 자각되었을 때만이 올바른 견처를 얻어 올바른 깨달음이 있게 되고 비로소 돈오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올바른 불교를 믿게 되고 수행을 하게 되고 실제 행을 이루어 부처님과 같은 삶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되지 않으면 제대로 깨달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즉 올바른 돈오가 아닙니다. 이를 분명히 알고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또한 본래 그 자리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자리여야만 됩니다. 고금의 선사들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이 식(識) 알음알이 이것을 가지고 소소영영한 자리로 삼는다. 이러면 어찌 잠이 꽉 들었을 때 소소영영하지 않느냐, 잠이 꽉 들었을 때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는 이 놈, 식을 가지고 소소영영한 자리인 줄 안다면 어떻게 생사를 대적할 수 있느냐? 잠이 꽉 들었을 때 소소영영 하지 않다면 도둑을 자식으로 삼아서 자기 수행을 삼는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성철 큰스님은 “본래 초월한 소소영영한 자리, 일체 모든 것을 초월한 그 자리가 소소영영한 것”임을 말씀하셨으며, 임제 큰스님도 내 목전에 아무 형상도 없고 이름도 없고 빛깔도 없는 분명하고 명백한 주인공인 이 한 물건이 도든 것을 초월한 지금 이대로 활발한 본래 나의 소소영영한 자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잘못 이해하여 본래 그 자리에 우리가 있게 되면 그것은 허망한 것이며 그런 것은 없다 라고 착각하여 이를 공부의 중심으로 삼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공부입니다.
우리가 식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이 놈으로 소소영영한 본래 주인고 자리고 삼는다면 이는 마치 도둑을 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나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이며 공(空)이다 하는 착각으로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소소영영한 것은 우리가 알고 보고 듣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초월한 그 자리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내가 여러분을 바라보듯이 여러분이 나를 바라보는 이 자리가 일체를 초월해서 일체를 드러낸 소소영영한 자리이며 항상 깨어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고 느끼는 소소영영한 그 자리가 따로 있으며, 우리가 식으로 보는 소소영영한 자리가 따로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일체를 초월한 소소영영한 본래 그 자리가 이대로 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이것이 소소영영한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닙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가운데 나는 나대로 오직 ‘나’이면서 여러분들도 또한 여러분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여러분들의 성품자리는 항상 같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서로 열려있는 것입니다. 곧 열려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오늘 나와 여러분은 모두 무상사에 있든 없든 모두 하나인 것입니다. 오로지 나는 일체 부처도 중생도 신도 같을 수 밖에 없는 절대적인 나입니다. 또한 각자가 나이면서 그 나가 열려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무상사에서 함께 같은 것을 공부하고 잇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생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며, 가족이며, 이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항시 본래 ‘나’는 열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자비행을 실천해야 하며 자신의 마음을 가꾸며 살고 있습니다. 오로지 나이면서 각자 나이지만 마음이 서로서로 열려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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