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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삼봉사 녹원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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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4-05 11:53 조회1,1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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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삼봉사 녹원스님

우리들 인간에게는 오관(五官)이라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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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에 자기보존을 유지하는 의(意)이다. 또한 지정의(知情意)가 포함된 오관을 흔히 육근(六根)이라고도 하며, 우리 불가(佛家)에서는 고(苦)의 원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관이라는 것은 육체를 보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빼어놓을 수가 없다. 눈과 코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만물을 보지 못하면 고행도 자유롭지 못하고, 냄새도 맡을 수가 없으며 호흡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오관이 의(意)에 결부되어 있기에 문제들이 따른다.

인간은 이 오관과 육근이 있기에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으며 무한히 향상하고 발전해 가지만, 또한 이것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즉 괴로움이다. 바로 생(生) 노(老) 병(病) 사(死)가 그것이다.

또 인간은 한없는 욕망의 동물이기 때문에, 남보다 더 잘 살아야 하고 더 오래 살아야 하고 부자로 살아야 하고 권세와 명예를 가져야 하고 더 아름다운 처첩을 거느려야 하고, 똑똑한 자녀를 두어야하고 또 재주도 있어야 하고, 보람 있고 명분 있는일들을 내가 해야 하는데 만약 이런 일들이 성사하지 못하면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생기고 괴로움 속에서 지옥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오관(五官) 육근(六根)이 인간으로 하여금 마음의 제 모습을 잃게 하는 작용을 가지고 있는데 그 근본적인 원인을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라고 할 때에 인간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질병은 어째서 생기는 것일까. 인간은 어째서 나이를 먹는지 모르기 때문에 오관에 의지하는 생활에 떨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은 늙어서 죽는 것이므로 살아있는 동안에 잘 먹고 잘 입고 즐기고 살지 않으면 손해라는 사고방식이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에 본능 그대로 오관의 작용에 끌려서 일생을 살아가려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한평생의 과정 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생명에는 진리에 의한 우주의 순환법칙에 따라서 엄연히 통용되고 있으며, 이 세상이 끝나면 저 세상에서 생활하고, 저세상의 생활이 일단락되면 다시 이 세상으로 태어나게 되는 엄연한 이치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되풀이를 계속하여 마침내 지구(地球)상에서의 사명을 다하고 나면 다른 천계(天界)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것은 본인의 자각을 떠나서 누구에게도 순환의 법칙은 인간의 생명에 적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같은 곳을 맴돌거나 아니면 무명(無明)의 그림자 속에서 방황할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기를 찾아내어야 할 것이다.

무자각(無自覺) 혹은 욕망대로만 산 사람은 저 세상에 가면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저 세상이 아니라도 우리가 사는 이 땅위에도 지옥은 얼마든지 있고 우리가 보고 스스로 느끼지 않는가. 무질서 무명(無明)속에서 얼마나 많은 비극이 있었던가. 경전(經典)에서는 남을 비방하거나 미워한 사람은 불타는 화택(火宅)의 지옥에 떨어지며 동물령에게 지배된 자는 동물(動物)과 같은 의식이되어 생(生)과 사(死)의 사이를 언제까지나 방황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극락과 천국도 있다. 공기는 신선하고, 주위의 사람들은 윤리와 인정이 있고 언제나 사로돕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참으로 낙원이다. 현세는 지옥과 천국이 상존(相存)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저 세상은 지옥은 지옥, 천국은 천국대로 나누어져 있다. 그 구별은 각자의 광자량(光子量), 곧 마음의 자세 여하에 따라 결정된다. 저 세상은 이 세세상과 같지 않다.

이 세상은 이를테면 평지(平地)이다. 그러나 저 세상은 빌딩건물과 같다. 일층, 이층, 삼층처럼 층계가 있으며, 일층에서 이층으로 가는데 는 계단을 한발 한발 올라가지 않으면 오르지 못한다. 일층과 이층은 단단한 콘크리트로 굳게 차단되어 있어서 아무리 외치고 떠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저 세상의 경우 아래에서 위는 볼 수 없으나 위에서 아래는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엄격히 구분되어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생명의 윤회전생(輪廻轉生)은 엄연한 순환의 법칙에 따르고 있다. 인간의 생명은 이 지상을 조화시켜 불국토(佛國土) 유토피아를 만드는것이 최대의 이상(理想)이며 목적으로 이것을 떠난 행동을 취하게 되면 바로 업(業)은 죄(罪)가 되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罰)을 받아야 하지 않는가. 육신은 잠시 죄를 면할 수 있어도 마음의 죄는 아무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마음이나 육체가 소우주(小宇宙)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自性)이 온전히 맑고 원만할때 비로소 무위안락(無爲安樂)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말하여 생사윤회(生死輪廻)에서 벗어나게 되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 세상을 살아 나가면서 여러 차례 자기의 입장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지니고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난처한 자리에 서게 되어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게 되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아주 어려운 입장에 봉착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서는 자리는 무엇보다도 신중히 정해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성숙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 일을 해 나가야 하는데 이때 간혹 자기가 서는 자리에서 말썽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한 것이다. 예를 들어 본다. 어떤 강가에 모인 사람들은 강을 건너기 위해 여러 가지 지혜를 짜냅니다. 이때 탁자위에 여러 가지의 지혜가 떨어지기 마련인데 탁자위에 떨어진 지혜를 간추려 보면 대강 몇가지 유형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렇게 되어 나갈 때 그곳에 있는 나는 어떤 집약된 의견 중의 어느 것 하나를 지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내 내가서는 자리가 여러사람들 속에 마련이 된다. 다행히 의견이 하나로 합일되면 문제는 간단하지만, 천차만별의 판단력을 간단하게 하나로 뭉치기는 힘든 것이다. 결국 의견들이 사분오열됩니다.

그때 곧 파당이 생긴다. 파당이 된 그 그룹은 자기들이 안출한 의견을 채택해서 강을 건너고자 강한 주장을 편다. 그러면 이내 상대편 그룹에서도 같은 입장을 취합니다. 한동안 다툼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다 보면 강을 건너야 한다는 본래의 주제는 어디로 멀리 보내버리고 눈앞에 보이는 반대되는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타도하게 된다. 그러면 그쪽에서는 또 타도당하지 않으려고 힘을 씁니다.

이때쯤이면 판국은 야릇하게 변모해 버린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곳에 와서 있는지조차 망각해 버리게 된다. 오직 상대편을 쓰러뜨리고 자기들이 옳다는 것을 만천하에 선포하여 어떤 각광을 받는 것이 능사인 듯 딜레마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강가에 나온 것은 분명히 우리의 앞에 보이는 강을 건너서 저쪽 江岸까지 무사히 당도하는 것이다.

오늘처럼 이렇게 세상이 어지러운 때에는 강을 건너는 데에 필요한 지혜가 만발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도강에 필요한 정확한 식견이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강을 진실로 건너 본 경험을 지닌 사람이 그 대중 가운데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이라는 것이 무슨 확고한 뜻을 지니기보다는 그냥 모이다 보니 대중을 이룬 것이기 때문에 뚜렷한 가치나 안목을 못 지닌 게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냥 모인 대중은 결국 어떤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수적으로 우세하면 어떤 가치를 그쪽으로 전환시켜버리고 마는 판국을 꾸미기 때문에 뚜렷한 가치기준을 갖기 어렵다. 이런 상황,

이런 시대를 우리는 혼돈의 시대, 전환의 시대라고 한다. 우리가 강가에 나온 것은 목전의 강을 건너 저 언덕에 가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강가에 이르러 마련해야 하는 자기의 설 자리는 분명해 진다. 두 다리에 힘을 꼭 넣고, 반듯이 서서 강 건너 저 언덕을 분명하게 바라보며 견고한 배를 마련하여 촌각도 허비함이 없이 열심히 노를 저어가야 될 것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 우리는 강가에 서서 거기 나온 얼굴들을 보고 무어라고들 평가를 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서 있는 자리를 보고서 하는 평가이다. 말하자면 강을 건너는 그 중요한 일보다는 다툼을 즐긴다거나 금쪽같은 시간을 헛되이 죽이고 있는 자리를 보고서 내리는 평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사람이 서는 자리」를 분명하게 골라서 서야만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어디에든 서야 한다.

그 설 자리는 자기 자신이 마련해서 서야만 한다. 많은 자리가 있습니다만, 사람이 서야 할 자리를 정확하게 골라서 서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자리에 알맞은 곳을 골라 정확한 마음과 몸가짐 으로 서는 것이 입지다. 정확한 자리에 서서 또한 흔들림이 없어야 문명한 자기의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불혹(不惑)이라고 표현한다. 설 자리를 잘못 정하고,

또 많이 흔들림을 계속하다 보면 사람대접을 잘못받기가 매우 쉬운 것이 인생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은 이런 것을 가리켜 외줄을 타는 분장사라고 비유했다. 외줄을 타기가 얼마나 어려운 노릇입니까. 몸의 중심을 잘못 잡아 한번 실수를 하면 영원히 나락으로 떨어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지혜를 얻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하는 것은 곧 인생이라는 외줄을 무리하지 않고 끝까지 잘 가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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