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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조계종 관등사 주지 법경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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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9-05 15:24 조회1,1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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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조계종 관등사 주지 법경스님
우리는 어떻게 부처님을 믿을 것인가.
우리의 믿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선 알고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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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부처님을 믿을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발심하는 사람의 최초의 질문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삼보(三寶)에 대한 신행을 강조한다.

불∙법∙승 즉 부처님. 그리고 부처님의 말씀, 그를 수호하는 스님을 일컫는다. 부처님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법신으로 말하기도 한다. 부처님의 말씀은 각(覺)의 세계를 언어로 표현한 경(經)을 말한다.

이중에서 부처님의 거룩한 세계를 이 땅에 실현하려는 일단의 출가 구도자를 승(僧)이라고 한다. 이 승의 모임을 승단(僧團)이라 하고 이 승단은 청정하고 또 청정해야 한다고 한다. 평신도들은 이 승가를 불과 법과 함께 믿고 받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래서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라는 삼귀의(三歸依)가 있게 된다. 언젠가 어떤 이가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를 거룩하지 않은 스님들에게는 귀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말해서 구설수에 어른 적이 있지만, 신도들은 승가 자체의 청정에 귀의하는 것이지 거룩하고 거룩하지 않은 어떤 출가 사문의 한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논쟁은 쓸데없는 믿음의 소모전에 지나지 않는다.

여하간 삼보에 믿음은 차별이 있어서는 아니된다. 그러한 차별이 없기 때문에 스님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그들을 맞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는 눈에 나타난 형상의 그림자를 보고 존경과 비난의 갈등을 갖기도 한다. 그래서 순수한 믿음을 어지럽히기도 하지만 이는 믿음의 대상과 본질이 뚜렷하지 못한 데서 오는 하나의 시행착오라고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신앙행태와 대만 등 동남아의 신앙 행태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근자에 홍콩, 대만, 일본 등을 여행하면서 이들의 신앙 행태가 어떠한 것인가를 유심히 눈여겨 살펴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배울 것이 어떤 것인가를 찾아 보았다. 얼마 전에 한국의 불교신도들이 경전을 얼마나 읽는가 하는 조사가 발표된 적이 있다. 나의 기억이 확실하다면 15%미만이었다. 거의 우리 불교인들은 부처님의 경전을 읽지 안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불교잡지와 다른 종교의 잡지 종류를 비교해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기독교 계통의 주간지 신문만 해도 6개 종류인데 불교의 주간지는 3개에 불과하고 월간잡지만 대도 불교는 정기간행물만 해서 7개 정도인데 기독교는 30여개 종류에 이른다.

이러한 피상적인 비교만해도 현대의 언론매체 뿐만 아니라 불서 포교에 있어서도 다른 종교에 뒤떨어져 있다. 더구나 기독요인들은 매주 교회에 나가 예배를 보지만 우리 불교신도들은 매주 법회가 열리는 사찰도 적지만 다니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 불법이라 해서 관음재일이나 또는 생일, 제사나 지내려고 절을 찾는 것이 대부분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뜻으로 이해하고 믿는 신도들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또 그렇게 신도들을 훈련 시키지도 않는다. 물론 우리 불교의 사찰은 시내보다는 산중에 더 많이 있고 웬만한 큰 절은 관광 입장 수입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아 사찰의 유지를 일반 신도들의 보시에 의지하지 않는 곳도 많이 있다. 그저 문화재적 가치만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보시를 하고 신도들의 간절한 소원과 마음의 괴로움을 해탈하게 하는 구도자적 역할은 자꾸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신도들도 큰 불사, 다시 말하면 불상을 조성하다든지 기타 눈에 보이는 불사에만 보시를 하고 그것도 자기가 주인이 되어 시주하려 하지만 그밖에 법보시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 한국불교의 가장 큰 취약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대만은 남방불교의 영향을 받았음이 확실하다. 그곳의 스님네들의 계율은 곧 부처님과 똑같다. 스님들이 시내에서 바쁘게 나라 일을 보다가도 공양 때가 되면 일제히 절로 들어가 공양하여 일반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을 찾아보기는 극히 어렵다.

그리고 일반식당에서 스님이 출입하게 되면 신도들이 경시하는 태도였다. 그런 반면에 신도들은 스님들을 모시기를 부처님과 똑 같이 모시었다. 그로고 스님들이 여간해서 신도들과 거리를 활보하지 않고 있었다.  비구스님은 보살과, 비구니는 거사와 함게 다니는 경우를 볼 수 없었다.

이와같이 엄격히 출가와 재각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상호 존중하고 아끼고 보살펴 삼보가 거룩하게 유지되어 있었다. 보시만 해도 그렇다. 대만이나 홍콩은 법보시가 크게 발전되어 있었다.

특히 경전의 판, 인행(印行)은 우리가 항상 배워야 할 것이다. 부처님을 어떻게 믿느냐 하는 이 우리들의 과제라고 말했다. 사실 부처님의 말씀대로 행함이 부처님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의심을 내지 않는 것이다. 무엇에 대하여 의심을 내지 말라는 것인가?

그것이 곧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것이요 그 말씀은 본래 우리의  마음이 청정하여 한 티끌도 없다는 것이다. 형상이 없는 것이 부처님이요 형상으로 부처님을 믿으려 하면 그것은 사견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참다운 부처님의 믿음은 이것이 행으로 나타나야 한다. 보시도 역시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가리킨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그 마음은 이미 청정을 더립혀, 한 생각을 일으킨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행으로 신천하는 것이 곧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을 인해하여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대만이나 홍콩은 그 지역의 특성에 따라 이제 사찰이 산중이 아니라 시내로 내려 왔고 아파트를 사서 그 아파트 방 안에 부처님을 모시고 법회를 갖는다.

어느 절에 가도 그 문 앞에 보시한 경전이 두툼이 쌓여 있다. 언제 누구든지 자기가 보고 싶은 경전을 갖고 갈 수 있다. 나는 아직 우리나라 절에서 그와같이 많은 법보시 경전이 쌓여 일반 신도들에게 나누어 주는 경우를 많이 보지 못했다.

우리 불교인들은 법보시에 너무 인색하지 않는가 한다. 조불,조탑 불사는 흔하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널리 홍보하는데는 아직 믿음이 서지 않은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사찰이 여러 가지 책들을 출판하는 것도 보았다.

이제 어느 사찰도 생산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이었다. 출판사를 운영하기도 하고 또는 그밖에 불구도 판매하여 사찰의 수입을 올리고 스님과 신도들이 각자 자기들의 위치에서 자기를 거쳐가는 모습을 볼 때 우리 한국 불교도 이제 시대의 추세에 의하여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 밥을 먹지 않는다는 백장(百丈)의 말씀이 실감나는 때가 온 것 같다.

우리의 믿음을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알고 믿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종래의 잘못된 보시를 바르게 세워 법보시의 교훈을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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