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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조계종 봉림사 주지 석경스님(총무원 호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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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9-06 10:12 조회1,1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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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조계종 봉림사 주지 석경스님(총무원 호법원장)
기복신앙은 부처님께 순수하게 귀의하는 기도로 순화되고

조화될 때 참다운 기복이 된다.

기도는 하나의 수행이지 결코 세속적인 행,불행,성공과

실패를 판결할 수 없는 것이다.
일체의 분별과 망상을 버리고 나라는 집착을 떠나

회향정신이 원력을 성취하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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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기복(祈福)의 길
언제부터인지 한국불교에 있어서 기복이라는 말은 불교의 정도에 어긋나고 사도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한국불교는 이제 기복불교에서 벗어나 참다운 보살불교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소리친다.

이러한 말을 들을 때 쉽게 생각되어지는 것은 기복이란 그 자체가 어떠한 내용인지를 알지는 못하지만 상식적인 의미의 기복은 문자 그대로 복을 기원하는 것으로(그 복은 개인의 복을 의미한다.)현세적인 뜻과 사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요, 보살은 영원한 것을 추구 하고(그것은 개인 뿐만 아니라 전체의 인간을 중심한다.)

공리적인 것을 대표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에서 우리들의 생각은 기복은 중생을 대신하는 보살행이 없고 그 가치의 표준이 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기 때문에 불교 본래의 대중적 무아사상이나 사신(捨身)의 정신이 배제됨으로 진정한 불교가 아니라고 간주하게 된다.

이러한 선입관에서 기복불교의 비판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다른 차원에서의 기복불교에 대한 저항은 기복법회의 의식과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군주의 탄생일에 왕의 만수무강과 국가의 발전을 부처님에게 비는 법회의식이 있었는데 이때의 기복이라는 말이 오늘날의 의식과 다른데서 연유되는 듯 싶다.

소위 불교가 지향하는 바는 왕 개인을 신성시 한다든지 또는 국가의 발전을 빈다는 것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다 대승적 견지에서 권리를 구하는 영원한 세계를 각(覺)으로서 얻음에 있는데 겨우 변화 무상하는 군주나 개인에 대한 신불의 가호를 빌릴 수 있느냐는 데서 오는 것 같다. 또하나는 불교는 각(覺)의 종교이다.

일체의 번뇌와 망상을 제거하여 깨닫는 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뇌와 망상이 우굴거리는 세속적 영화에 부처의 가호를 빈다는 것은 어불성설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다른 하나의 교리적 지식의 모만이 붙어 있다.

부처님의 말씀중에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고 사람은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인데, 어디에 부처를 따로 두어 그의 무한 위신력으로 현세의 현실생활을 편안하게 기구하느냐 이는 불법에 어긋난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기복불교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나만의 복을 원하고 있다는데 그 근본이 있고 그것으로 인한 피해는 불교의 보살행이 설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본질은 자비이타행으로 대립되는 보살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기복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일단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또한 타당하다고 본다. 적어도 ‘나만의 복’을 위해 불교를 갖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신앙을 포기하는 그러한 신앙행태에 대하여서는 이러한 비판과 질책은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불교의 내면적 여러 동기에 접해서 생각한다면 소박하게 인간의 품성 가운데 처음부터 진리만을 위해 신앙을 찾는 고차원의 동기를 갖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인간성의 본성 가운데 과연 현세적 욕구를 전혀 배제하고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에 있어서의 기복의 참뜻에 대한 현대적 조명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 자신의 실존적 극한 상황이 있다. 그러한 극한 상황을 부처님은 삶과 죽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투쟁과 질병, 늙음으로 요약될 수 있다. 부처님의 출가 동기가 이미 사문유관에서 보여주듯 생,노,병,사와 사문과의 만남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모든 불교적 열정은 곧 생,사의 일대사를 확연히 개치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함에 있다.

 

인간의 원초적 종교 심리적 동기는 이와같이 소위 기복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수명장수, 질병으로부터의 해방,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앙으로부터의 해방, 기타 크고  작은 소원의 성취가 일차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을 위해서 믿음을 전개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또 있어서도 안된다. 또 그렇게 교리가 짜여져 있지도 않다.

불교는 최초의 동기부여는 기복이 일차적이었다 해도 그것을 성취하는 데는 전혀 다른 차원의 교리와 수행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저 부처님께 손을 비빈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기복과 기복의 의미를 분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처음 불심을 내는데는 기복이지만 그 기복을 성취하는 방법에 있어서 올바른 믿음이 전개된다면 그 기복은 지양되어 보살전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무조건 기복을 타부시 할 것이 아니라 일차 방편상에 있어서 일단 신앙의 동기로 인정하고 그 복의 성취방법에 있어 바르게 이끌어 간다면 기복과 보살이 본래 하나로 조화됨을 볼 것이다.

기복의 성취는 그저  복의 염원에서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고 불교 교리에 의한 일정한 작법이 있다. 그것이 곧 기도 하는 방법이다. 이 기도 내용 중의 어디에 나만의 복이 성립되는가? 모든 중생 가운데서 보살행이 원인이 되어 그것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안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미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하여서는 나의 일심이 부족한 까닭에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모두가 부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았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본어 사전에는 기복이라는 말이 없다. 오직 기도와 기원,기청 등이 있을 뿐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기복이란 우리 한국 불교에서 나온 말임이 틀림없다. 올바른 기도법을 통하여 기복이 보살화되어야 한다.

기복의 의미와 그의 작법을 그대로 실현한다면 기복이라고 해도 잘못이 없아. 기복만 말하고 올바른 기도가 없었기 때문에 비판적 시각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복의 의미는 먼저 나의 본 생명이 본래 부처인데도 이 사실을 모드고 다생겁에 걸져 번뇌,망상의 죄업으로 인하여 얻어진 나쁜 가지관, 생활습관, 사고방식을 부처님의 무한 기피력으로 소멸시키려는 절실한 구도심에 있다. 그리고 기도의 내용으로는 부처님의 구세대비(救世大悲)의 원력이 성취되기를 마움속에 새긴다.

또한 중생을 다 건지겠다는 사홍서원을 투철하게 갖는다. 이제까지 마음의 갈등으로 대립하여 탐, 진, 치 삼독으로 가려진 마음의 모든 것을 제거 하고 ‘나’라는 집착을 떠나 회향정신을 갖는다.

그리고 내가 지금 원하는 기복의 소원이 성취됨에 있어서는 나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모든 중생과 제불보살의 가피력에 의한 것이므로 그의 공덕을 중생에게 돌리고 감사한다. 일체의 대립을 없애고 동체대비를 실현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게 된다면 지금 내가 비록 나와 나의 가족을 위한 복을 원했다 하지만 그의 실현은 이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이 마음이 ‘나’라는 데 집착되어 번뇌와 망상의 암흑속에 헤맨다면 기복이 성취될 것인가? 기복의 성취는 마음의 청정과 일심에서 성취되기 때문에 이미 청정, 일심이 되면 나의 문제는 모두 일체의 중생에게 회향되기 때문에 거기에 성취와 실패가 있을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고 쓸데없는 망상에 사로잡힌 집착으로 기도하면 실패라는 분별이 있게 된다. 부처님 불상에는 본래 모두가 부처이기에 성공과 실패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중생의 분별심으로 성공과 실패가 뚜렷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오직 업장소멸의 단계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에 의한 기도하는 방법은 어떠한가? 기도하는 사람은 비록 나의 건강, 기타 다른 성취 목적 등을 기도하더라도 나를 집착하지 않고 부처님의 무한 광명속에 건강과 기타 성취가 본래부터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본래의 기도 목적에 어려움이 생기더라도 곧 그것이 부처님의 뜻이거니 생각하고 오히려 고난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게 된다.

부처님의 무한 자비 위신력과 원만 실상이 항상 나와 함께 있음을 확인하고 일체의 대립된 생각을 버리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안, 초조, 욕망 등이 본래 공(空)함을 본다. 이러한 마음자세로 일심으로 염불하다 보면 염불삼매에 들게 되고 염불삼매에 들면 성공과 실패는 모두 사라지고 오직 부처님의 자비, 원만, 실상만 들어나 일체의 대립이 공하여 동체대비의 세계가 열리며 사심은 없어지고 공심만이 남는다.

이러한 방법은 독경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불교는 세계나 인생을 유한한 단절로 생각지 않는다. 무한의 연속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윤회되는 원형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 윤회의 세계를 중생계의 고(苦)라고 본다. 따라서 이 고의 세계를 넘어서는 해탈의 낙원을 열반이라 하여 그곳은 윤회의 사슬이 없는 곳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무한한 중생계에 있는 한 그것은 윤회될 것이고, 깨달음이 없는 무명일 것이다. 무명의 극복이 곧 일심청정일진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수행해야 함은 마땅하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의 수행이지 결코 세속적인 행, 불행, 성공과 실패로 판결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의 성취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윤회의 세계에서는 선세죄업(先世罪業)이 소멸되는 과정이고, 또 그러한 성취가 되지 않음은 아직도 죄업이 남아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이제까지 이만한 인연으로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악도에 떨어졌을 텐데 이 정도로 존재하는 것에 감사하여야 한다.

그리고 일정한 기도 기간이 긑났고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마음은 고삐 풀린 망아지이기 때문에 언제 방심을 낼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기복과 기도에 관해 말해 왔다.

기복이라고 해서 모두가 나쁜 것이 아니다. 오직 기복의 사욕만 있고 부처님의 무한광명인 무아를 통한 청정자성과 일심의 세계를 모를 때 기복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동기로서 기복을 통해 참다운 부처님의 세계로 귀의하는 기도로 순화되고 조화될 때 참다운 기복이 되고 그것은 곧 보살의 근원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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