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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조계종 구절암 성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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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9-01-11 18:31 조회1,3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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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조계종 구절암 월산 성법스님

(충남문화재 제361호 지정 마애불)

출가자의 진정한 참뜻은 무엇인가?

부처님은 왜 출가를 했는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천지를 진동할 만한 반성의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야 한다.

중생이 있기에 부처가 있고

무명이 있기에 청정이 있으며

생사가 있기에 열반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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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제가 제대로 풀어지지 않을 때 출발의 원점을 돌아보면 지금의 좌표가 선명해 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미래의 전망이 뚜렷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급 우리는‘모든 일이 잘 되고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이 결코 만족하게 그렇다’라고만 응답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확실히 여러 가지가 뒤엉켜져 있고 그 얽혀진 것이 정당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오늘의 불교적 현실이다.
과연 부처님은 왜 출가를 결행하였는가? 시시각각으로 밀어닥치는 이러한 의문은 바로 출가를 바르게 아는 정도로 인도해 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출가 동기를 모르고, 또는안다 해도 은폐시켜 버린 채 그냥 일상적인 자아로 살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구석 하나하나가 부처님이 출가의 근본뜻에 어긋나지 않게 잘 이루어지고 있는 데가없다. 이 시대를 이끌어갈 진리의 옥천이 너무 메말라져 버렸다. 천지를 진동할 만한 반성의 회오리바람이 일어나야 하겠다. 과연 부처님은 왜 출가하였는가를 되뇌어야 한다.
어느 날 싯달타 태자는 농민의 날 행사에 참여했다가 농부들이 밭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때 쟁기 끝에 파헤쳐진 흙 속에서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바로 이때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그 벌레를 쪼아 물고 공중에 날아갔다. 이러한 광경을 보게 된 어린 싯달타는 마음속에 충격을 받고.‘ 어째서 살아있는 것들은 서로 먹고 먹히며 괴로운 삶을 이어가야 할까. 무
슨 이유로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것에 깊은 회의를 갖게 된다. 그리고 그는 심문을 나오면서 노·병·사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했고, 그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출가하였다.
우리는 지금 어린 싯달타의 출가 동기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가, 삶과 죽음을 해결하고 영원한 삶의 진실을 밝히는 깨달음에의 정열이 얼마나 불타고 있는가. 나만의 삶이 아니요. 나만의 죽음이 아닌 인간 공동의 삶과 죽음을 싯달타는 출가를 통하여 깨닫게 되었으며, 마침내 각자가 된 것이 아닌가.
우리는 지금 출가의 새로운 의미를 반성해야 할 시점에 왔다. 부처님의 출가가 모든 사람들
에게 간절한 생의 의문이었듯이 그 생의 의문을 해결했던 그의 수행의 길을 모범 삼아야 한다. 결코 그의 출가의 동기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 개인주의적이고, 교단 적이지는 않았다.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죄와 같은 의문을 끊고 보다 굳건한 생의 지반을 확립하는데 있었던 것
이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삶과 죽음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가.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 과연 우리가 각자의 출가를 결행하고 있는가. 그저 막연한 감상으로 출가를 이해한다든지 또는 삶의 수단으로 삼고 있지는 않은 지 보다 심각하게 반성해 보아야하겠다.
출가의 동기가 뚜렷해야 그 결과도 확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출가정신은 바로「나」와「집」의 울타리가 부서질 때 열려지는 것이다. 어울려노는「마당」이 되는 것이다. 그 마당이 곧 보살의 마음이요 자비의 마음이다. 나만이 잘살려는 기복(祈福)이 아니다. 너와내가 함께 사는 기부이다.
우리 불교는 어느 부분에 있어서 출가정신이 오도된 측면이 있기도 하였다. 순수한 인간정신의 고독한 반문이 아니라 오히려 권위와 전통의 보수에서 다시 태어남이 없이 안주하고 있기도하였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그러한 권위와 관습으로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항이 아님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썩은 살은 도려내야만 새살이 나오게 마련이다.
출가가 진정한 출가정신이 아닌 어느 구석이 있다면 차제에 새로운 출가를 시도해야 한다.
출가정신은 끝없는 출가가 수행되는 데서 참다운 출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 불교에는 사대 명절이 있다. 부처님의 탄신, 출가, 성도, 열반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까지 이 명절 중에 부처님 탄신일만 종단적 규모의 행사를 거행해 왔다 그리고 각 사찰마다 등을 담고 성대하게 경축하였으나 부처님의 출가일이나 다른 기념일은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은 느낌이 있다.
물론 뜻있는 사찰이니 스님들에 의해 출가일을 기념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하여 왕자이었던 싯달타가 출가하게 된 동기와 그 의의 및 정신을 되새겨 뜻을 기리는 행사나 법회가 있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이는 출가일에 비중을 두지 않은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데서 오는 결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 참다운 부처님의 깨달음의 정신을 재조명함이 바로 이 출가에 귀일된 다고 볼진대 앞으로 싯달다의 출가일을 기념하
는 행사가 정례화 되어야 하겠다고 재언한다. 출가는 곧 깨달음의 근본 동기에 있기 때문이다 새해를 맞아 우리 각자의 출가가 있어야 하겠다.
부처님 사바세계에 오심의 참뜻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의 오심은 오로지 무명의 어두움에서 헤매는 모든 중생들을 깨져주기(覺)위해서라고 말한다. 무명의 아픔을 깨친다고 할때 본래의 우리들의 진면목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가? 두 말할 여지없이 부처의 본 생명력(本生命力)도 원각(圓각)에 있다. 이 원각은 일체 청정한 진여와 보리와 열반과 그리고 바라밀을 흘려내어 보살들을 교수하나나니 일체 여래의 본기인지(本起因地)는 모두가 청정원각을 원만히 비
춤에 의하여 무명을 영원히 끊은 뒤에야 불도를 이루셨느니라‘하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결국 깨달음이란 기상천외한 신통묘용이 아니요. 천당 지옥을 자유로이 들락거리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듣고하는 모든 감각적 세계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여 더럽다고 생각한 일체의 대상이 더럽히지 않음으로 청정이라 한다. 또한 허망하거나 변함이 없으므로 진여요. 무명 속에도 언제나 밝으므로 보리요, 생사에 따르면서도 본체는 요동이 없음으로 열반이요. 여섯 가지 바라밀로써 생사의 이 언덕을 넘어서기 때문에 바라밀 이라 한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행함으로 우리가 원각의 경지에 들게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소영영하게 보여주셨다. 어떤 것이 무명인가? 무명은 밝지 않음이요, 밝지 않음은 어두움이다. 어두움이라는 것은 눈을 감아서 이 밝은 대낮을 보지 못해서 어둠다고 할 수 있고, 눈은 떴으나 이 세상이 밤이 되어 어두울 수도 있다. 여기서의 어두움이란 밝은 세상을 놓고 내가눈을 감고 어둡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언제나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눈을 살그머니 떠서 이 세상을 보려면 그 빛나는 햇살 때문에 견딜수 없어서 그만 감아버리고 눈감은 속에서 혼자서 환상을 갖고 그것이 이 세상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 착각은 마치 언제나 지·수·화·풍으로 흩어져 그 실체가 없는 이 몸을 잘못 알아자기 몸이라 하고 육진(六塵)의 그림자를 자기의 마음이라 한다. 그러나 원각 자성에는 몸도 마음도 나눠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명 때문에 몸과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 때문에 죽고 나는 현상에 국집되어 공연히 생사의 끝없는 바다를 헤맨다. 이는「마치 바다 전체를 버리고 거품 하나를 바다로 여기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우리 들이 보고 듣고 하는 이 세계에 대한 관념에 대하여 그것은 물질의 집착 때문에 일어난 하나의 착각이라고 말하는데 그 착각이라는 맘은 바로 현실에 대한 부정을 말한다. 이 부정은 반대를 위한 부정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 보고 있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지금 저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을 바로 달인 줄 아는 미혹의 중생들에게 그 손가락이 달이 아니 라고 말하고 비로 달을 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부처님의 저 간곡한 말씀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올바르게 지키고 있는가? 중생이 있기 때문에 부처가 있고 무명이 있기 때문에 청정이 있고 생사가 있기에 열반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연 중생을 얼마나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중생을 섬기는 것이 된다. 그러나 법당의 부처님만 섬기고 고통 받는 사람을 섬기지 않은 적이 있는가 반성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 불교는 과연 이러한 부처님의 근본사상에 얼마나 근접되어 있는가? 부처님은 현실을 부정하셨다. 만약에 현실이 깨끗하고 밝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다운 현실 진단사가 아니라고 본다. 그러기에 그 현실은 더럽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또한 더럽다고 생각하고 그것만을 고집하고 집착할 때 부처님은 본시 우리의 현실은 깨끗하다고 말씀 하셨다. 그러나 더럽다는 것과 깨끗하다는 차별은 본래 깨끗했기 때문에 더러움이 사라지면 깨끗함이 되는 것과 같이 그것은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관념의 착각에 의함이라는 것을 역설하신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깨끗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결국 부정의 부정을 거쳐 영원한 긍정을 말씀하신 것이다. 영원한 긍정이 곧 대각이요, 절대 긍정이다. 사문은 그러기에 그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누더기 웃을 입고 중생을 제도하였던 것이다
중생은 소유의 화신이다. 소유를 하지 않으면삶을 증거지유 수 없다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있다. 이에 대하여 출가사문은 무소유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출가의 대는 무소유다. 그것은 몸소 부정을 실현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정신을 받아 들이고 있는가.
열반의 4덕(四德=常·樂,我·?)을 원력으로 삼고 그것을 위해 수행한다. 그러나 열반이란 과연 어떻게 얻어지는가? 열반은 대멸도(大滅道)이다. 대멸이란 무위(無爲)에로 돌아와 정지(正智)마저도 없어진 세계이요, 적막하여 움직임도 없고 일어남도 없다는 뜻으로 마침내 일체의 번뇌를 끊어 없앰이다. 유위가 있음으로 부위가 있는 것이요. 생멸이 있기에 고요함이 있는 것이요, 번뇌가 일어남으로 그것을 끊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무지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볼 때 상(常)이라고 보고, 낙(樂)이라고 보고 아(我)라고 보고 정(?)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상이고, 낙이고, 아라고 보는 한에 있어서는 소유의 영원을 주장하여 대립과 다툼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이때 부처님은 우리의 잘못된 관념을 부수고, 무상과 고와 무아와 부정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중생은 이 부상·고·무아로 보는 반야의 비춤을 모르고 그것에 집착하여 인생은 고해라 생각하고, 부상을 말하여 미망에 헤매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무상· 무아·고에 대하여 다시 부정하여 상·낙·아·정의 적멸을 말하니 이 것이 곧 부처님의 부정의 부정으로 인한 대긍정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불교는 어떠한가? 부정도없고 긍정도 없지 않는가? 아픔이 있고 난 후에건강함이 은혜를 알 수 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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