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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조계종 장왕사 일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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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5-29 15:10 조회1,2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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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항상 신령스럽다면 이것이 성불이요, 부처님이다” 우리 부처님은 누구인가? 신라의 원효 대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고승으로 대부분의 불자들이 잘 알고 있는 스님이므로, 특별한 소개 없어도 그에 대한 행장은 생략하겠습니다.
원효 스님은‘발심수행장’의 첫머리에“모든 부처님이 적멸궁을 장엄하셨다”는글을 두었습니다.
왜 원효 스님께서는 이글을 가장 앞에 두었을까요? 그 까닭은모든 불자들의 목표요 나아가야 할 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자입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부처님의 아들 딸이 되기로 작정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불자라면 어버이 되시는 부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부처는 범어 붓다(Buddha)에서 나온 말입니다. 중국에서는 붓다를 음역하여‘불(佛)이라 하였고, 뜻으로 번역하여‘각자(覺者, 깨달은 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진리 그 자체인 법(法Dharma)을 깨달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부처’속에 담긴 각뿐의 의미는 이것이 상입니다‘. 자각각타각행원만(自覺覺他覺行圓滿)’입니다.“스스로 진리를 깨달았고 그 진리로써 다른 사람을 깨우칠 뿐 아니라, 깨달음의행이 원만한 분”이것이 붓다, 곧 각에 대한 실체적인 해석입니다. 환멸의 삶을 살아야그럼 이 부처님들은 어디에 계시는가? 원효스님은 적멸궁(寂滅宮)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적멸의 궁전! 적멸은 범어 니르바나(Nirvana, 涅槃)를 뜻으로 풀이한 말입니다. 니르는 ‘사라지다· 꺼진다’ 등의 상태를 나타내는 부정적인 접두사이고, 바나는‘불’이므로, 니르바나라고 하면‘불이 꺼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번뇌의 불길이 모두 꺼져서 본래의 고요함으로 되돌아간 상태’를 일컬어 적멸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적멸은 환멸(還滅)입니다. 적멸로 되돌아가는 환멸. 이를 인생살이에 비유하여 조금 쉽게 풀어봅시다.
삶을 사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
음에 빠져서 끊임없이 타락의 길로 흘러가는 유전(流轉)의 삶이고, 또 하나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끊고 스스로의 진실을 체험하며 참된 본성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환멸의 삶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중 환멸의 삶을 택하여 어떠한 번뇌의 불길도 일어나지 않는 적정의 상태에 이르게 됨으로써
부처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45년 동안 중생들에게 환멸의 삶을 가르치다가, 이 육신으로 인한 마지막 장애까지를 모두 비리고 적멸의 보궁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을 적멸보궁이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누구든 환멸의 삶을 이루어 적멸의 보궁에 들어서면 8종의 법미를 맛볼수 있습니다.
①생멸변화 없이 늘 머무르는 상주미(常住味) ②번뇌의 불길이 완전히 꺼진
적멸미(寂滅味) ③영원히 늙지 않는 불로미(不老味) ④다시는 죽지 않는 불사미(不死味) ⑤언제나 깨끗한 청정미(淸淨味) ⑥허허로이 통하는 허통미(虛通味)
⑦동요됨이 없는 부동미(不動味) ⑧항상행복한 쾌락미(快樂味).
이와 같이 적멸궁 안에는 영원(常), 행복(樂), 자유로움(我), 청정(淨) 등의 갖가지 덕이 충만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적멸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원효 스님께서는“오랜 세월 동안 욕심을 버리고 고행한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한량없는 세월 동안 욕심을 버렸고, 모든 괴로움을 참고 이기며 용맹정진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것을 쫒아가지 않고, 힘든 수행을 기꺼이 감수한 결과 적멸궁을 장엄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지은대로 받는 업의 논리로 풀어봅시다. 만일 나쁜 업의 발생 요인이 되는 욕심과 분노에 빠지지 않게 되면 지금부터는 나쁜 업을 짓지 않게 됩니다.그리고 과거에 지은 나쁜 업을 소멸시키고자 하면지금 지난 세상의 업보들을 기꺼이 받아야 합니다. 곧 탐욕과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현재나에게 다가온 업보를 기꺼이 받으면서 살아가면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고 청정한 적멸의 궁전이 저절로 지어지게 되는 그러므로 적멸궁을 짓고자 하는 불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지금의 업보를 기꺼이 받고자 해야 합니다. 아무리 현실이 괴롭더라도‘기꺼이 받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을 참고 견디면 나쁜 업이 더 빨리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과거의 나쁜 업이 다 녹아죄가 없어지면 복이 생기고(죄멸복생 罪滅福生), 복이 깃들면 마음이 신령스러워집니다(복지심령 福之心靈). 만일 우리의마음이 항상 신령스럽다면 그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성불이요 부처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승불의 진리를 즐겨라 사람들은 흔히“아이구, 속 탄다. 속에서 천 불이 끓어오른다”고들 합니다. 바로 내 마음의 불집 속에서 매일같이 속을 태우고 볶고 끓이고 썩히는 것입니다. 스스로 불집 속에 들어가 속을 태우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중생의 삶입니다. 집이 불타고 있고, 조금 있으면 타 죽게 되어 있는 데도 그 집 속에서 무엇인가를 하기에 바쁜 존재. 그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중생들을 불타는 집 밖으로 나오게끔 인도하는 분입니다.하지만 중생의 근기가 각각인지라,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먼저 그들 각각이 원하는 선물을 주겠다고 합니다.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성문(聲聞)’의 성품을 지닌 이에게는 양의 수레를, 홀로조용히 명상하며 인연의 이치를 관찰하기를 좋아하는‘연각(緣覺)’의 성품을 지닌 이에게는 사슴의 수레를,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보살(菩薩)’에게는 소의수레를 주겠다고 하여 이끌어 들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대자비는 성문·연각·보살의 경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방편으로 세 종류의 수레를 제시하지만, 결국에는 그들 모두에게 흰 소가 끄는 가장 멋진 수레인 대백우차(大白牛車) 곧 일불승(一佛乘)의 가르침을 내려 부처가 되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법화경」의 화택유에서 처럼, 대부분의 중생은 불의 무서움도 잊은 채자기들의 놀이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좀처럼 집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불타는 집에서 정신없이 살다가 그 불에 타서 죽고 또 다시 불타는 집에 태어나 죽고 또 죽고…. 이것이 윤회하는 중생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중생의 집인 화택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 것인가? 좁게 말하면 원효 스님의 말씀처럼‘한없는 세상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고, 조금 더 넓게 보면 삼독심(三毒心) 때문입니다.
원효 스님께서는 이어지는 다음 구절에서 삼독심과 욕망에 대해 거듭 말씀하고 계십니다. 불자들이여, 간곡히 당부 드리오니, 부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 속에서‘지금의 탐욕을 놓아버리고 지난 업을 기꺼이 받겠다는 자세로 살고자 하는’발심을 합시다. 이 생각만 분명하면 부처님께서는 반드시 철부지 어린아이인 우리를 불타는 집 밖으로 구출해 주십니다. 그리고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적멸궁에서 살 수 있게끔, 일불승의 대진리를 즐길 수 있게끔 해주십니다. 불자들이여, 무엇을 선택할 것입니까?
계속 불타는 집에 머물 것입니까? 진짜로 발심하여 부처님의 적멸궁으로 나아갈 것입니까? <정리=이연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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