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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국불교조계종 약도암 용월 락현 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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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9-08 20:04 조회1,664회 댓글0건

본문

 

 

내가 누구인가를 깨치는 약사도량 평택 약도암
난치, 불치병 한자 민간 자연요법 기적 치유
해탈은 포기아닌 재생이며 열반은 죽음이 아닌
삶의 이면을 올바르게 깨우치는 참다운 공양
중생과 부처가 둘이아닌 불이의 행원을 실천

 

평택 약도암 주지 용월 락현 대종사
H.P : 010-7123-1690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송화1길 49

 

 

불교, 어떻게 신행해야 성불할 것인가

 

올바른 믿음
불교를 접할 때 사리분별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일 먼저 불교는 무엇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하는 의혹에 빠진다.
그러한 원인은 우리의상식이 일신론적이거나 또는 다신록적인 인격적 신론에 익숙되어 있으며 적어도 믿음이란 어떤 절대적 대상을 신앙하는 데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는 선입관이 내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는 그러한 통속적인 종교의 개념과는 다른 이론과 교리에 의하여 체계화 되어 있으며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 절대적 인격체가 아니라는 데서 우리로 하여금 당혹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전통적으로 부처님은 유일신록 적으로 믿고, 그를 통하여 이고득락(離苦得樂)을 기복하는 순박한 믿음을 전제로 하는 한 신앙형태로 있어 왔지만, 오늘날 올바른 믿음을 반성하고자 할 때 이러한 신앙태도로는 많은 반성을 요청하기도 한다.

 

믿음의 원초적 동기인 이고득락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실천해 나가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측면과 차원이 전개되는 것이 불교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무조건 신불에 의존하여 믿는다고 해서 바라는 바 소원이 모두 성취되는 만병통치적 신통묘용의 종교가 아니라는 것에 그 특징이 있다.

오히려 더욱 깊이 들어가면 인간이 요구한 바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대아적인 면에서 보면 이루어졌다는 역설적인 세계를 소중하게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역설이 성립될 수 있는 근거는 이제까지 우리가 생각하고있는 지구촌의 한계적 사유를 초월하여 보다 큰 무한의 상대적 절대세계로의 사유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땅에서 하늘을 보니 하늘이 창창하여 끝이 없지만, 하늘에서 땅을 보면 이 땅이 끝이 없어 푸르게 보인다는 비유와 같이 상호 의존적 관계를 말한다. 직선의 절단적 사고가 아니라 원형의 연계적 사고에서 세계와 인간을 보기 때문에 결코 일회적이고 이분법적인사고를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불이의 세계와 인생을 보는 차원이 있다. 이것이 불교가 다른 유일신교나 다신교, 단일신교와 다른 점이다.
이러한 차이점은 믿음의 대상으로부터 달라진다. 신을 설정하는 다른 종교는 나의 믿음을 초월적인 하나님의 세계로 인도하는 수단으로 결코 내가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체가 될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불교는 부처와 인간의 마음이 평등하여 본래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는 결코 절대적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부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다. 그는 독립된 개체로서 실재하는 소유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붙들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마음의 본체이다. 마음의 본체는 결코 이것 저것으로 한정되고 개념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미론을 넘어선 것이고 주체적이고 자각적 체험의 소산이다. 그것에 말을 붙여 불(佛)이라고 한 것이다. 불이란 고유명사이지만 그의 진리와 진리의 화신으로서 법신, 불신을 말할 때는 명백히 보통명사로서 무한한 수량을 대표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믿음은 이와 같이 고유명사와 보통명사의 합일된 믿음을 말한다. 물론 이때 고유명사나 보통명사란 말은 일체양면을 말한다. 고유명사로서의 부처님이면서 보통명사로서 부처를 가르킨다. 보이는 면에서는 고유명사와 부처님이고 보이게끔 하는 데에서는 보통명사의 부처이다.

불교에서는 신앙이 아니라 신심이라 말한다. 이것은 신앙의 어감이 믿어서 우러러 보는 것으로 이해됨으로써 믿는자와 믿음의 대상을 이원적으로 보여지고 또 실제 그렇게 믿는 종교를 일컫는다. 그러나 신심은 믿는 자와 믿음의 대상이 둘이 아니다 이미 부처와 중생과 마음이 차별이 없다고 말한 화엄경의 정신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믿는 것은 누가 믿는가?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내가 믿는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무엇인가? 내가 누구인가? 그것부터 밝혀야 하겠다. 나란 결국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육체는 언젠가는 부서져 사라져버릴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임을 생생히 아는 정신적 영혼도 나의 일부이다.

그런데 육체나 물질은 언젠가 사라짐을 알 수 있지만 영혼이나 정신은 시작된 바도 끊어진 바도 우리가 알 수 없다.

우리는 이것을 마음이라고 말한다. 마음으로 마음을 아무리 보아도 볼 수 없다. 마음은 볼 수 없는 것인데 볼 수 있다하고 어떻게 생겼다고 하는 것이 곧 집착이요, 마음의 한정이다. 마음을 한정하면 물질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소유욕을 대변한다.

마음은 마음으로 볼 수 없고 마음을 집착하는 것이 어두움이요 물질이라고 보고 마음은 자유로워서 볼 수 없다는 측면을 말로 하자면 불성(佛性)이다.

이것은 또한 각성(覺性)이다. 물질은 마음의 한계에 의하여 여러 가지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유한하지만 마음은 그 자체가 본래 무소유라 무한하다고 본다 여기에서 이 마음의 무한, 자재, 원만, 실상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물질의 전부가 아니라 그것은 마음의 한정에 의해 만들어진 일시적인 마음의 부분으로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마음의 파편인 물질적 요소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파편의 근원인 마음 자체로의 환희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은 누가 가지고 잇는가?  모두 나라는 개체들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개체들의 본원마음은 변하지 않고 영원한 그것이다. 영원한 그것은 어떤 형상을 가질 수 없다. 형상을 갖는다면 유한하기 때문이다. 유한한 것은 파괴될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음은 소유한 바가 없기 때문에 파괴될 것이 엇다. 마치 물이 둥근 그릇 속에 들어가면 둥근 그릇의 모양으로 바뀌고 네모진 그릇 속에 들어가면 네모진 모습으로 바뀌지만 그 물의 본성은 변함이 없듯이, 또한 바닷물이 파도가 된다고 해서 물의 습성이 없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마음의 본성은 이러한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각성이다.

이 때 믿음은 일반적인 믿음을 말하듯이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억지로 믿어 보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존재사실을 그대로 자연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물러서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각은 모든 제한적인 요소를 떠나버리는 데서 저졀로 그렇게 됨이다. 그리고 각(覺)은 어떤 형상이 아니고 상태가 아니다. 상태라면 한계가 잇고 그로 힌하여 있다 사라지고 변화된다, 그러나 각은 있는 그대로요, 우리가 그것을 확인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 사실을 확인할 때 그것이 나타날 뿐이다. 언제나 있으나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 확인이 곧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불, 즉 각의 확인이요, 진리 자체의 믿음이다. 현상적인 것 감각적인 것에의 집착은 번뇌요, 망상으로 불각(不覺)이다. 따라서 그것을 떠나서 일어나는 마음이 곧 깨끗하고 맑고 무한하고 진실하고 영원함을 믿는 것이다. 여기에 어디 무엇을 요청하는 소유의 마음이 끼여들 수 있을 것인가? 처음 시작은 나의 육체의 복을, 사회적 명예를 갈구했지만, 그것의 실현은 오직 각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미 그러한 요청은 각에서 무화됨을 안다. 따라서 진정한 믿음은 성취와 실패가 무화됨을 말한다. 거기에 각의 광명이 보인다.

마음 자체는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고, 그것은 병도 없고 죄도 없다. 그것은 완전무결하여 어떤 것에 의존되지도 않을 뿐이다. 죄가 없기에 지옥에도 극락에도 가고 옴이 없다. 이것을 믿는 것이요, 이것을 보는 것이다.

 

올바른 깨침
이러한 마음 자체, 불성, 각성을 믿음으로써 어떠한 세계에 도달되는가?
그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깨달음은 열반이요, 해탈인 것이다. 마음은 대적멸(大寂滅)이다. 대멸도(大滅道)이다. 대하는 것은 이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는 뜻이요, 성품이 넓고 커서 허공에 이르지 않는 데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이보다 길고, 높고, 깊은 것이 없다는 것을 표현한 뜻이다.
멸이란 다함이 없는 세계로 돌아옴이요, 적막하다는 뜻이다. 본래부터 움직임도 없고 일어남도 없다. 모든 것은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이 아니어서 본래부터 적정(寂靜)함을 말한다. 일체의 번뇌를 끊어 없애는 것이다. 열반은 그 주체 멸하는 것이 아니다.
도(道)란 무엇인가?  도란 구경(究境)이라는 뜻이요, 번뇌를 끊어 없앤 덕(德)을 말한다. 그러나 번뇌를 끊어 없애는 것과 번뇌를 내지 않는 것과 구별된다. 번뇌를 끊어 없앰은 이미 번뇌가 일어난 것을 끊는 것을 말함이요 번뇌를 내지 않는 것은 번뇌가 일어나기 전에 번뇌를 막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전자는 지나간 것을 바라보고 하는 말이어서 그 뜻이 아직 부족하여 보살이라 말하고 후자는 뒤에 있는 결과를 바라보는 말이어서 그 뜻이 구경이다. 그러기에 부처님이라 말한 것이다. 부처님은 번뇌가 일어난다 없어진다를 붙일 수 없다.
번뇌를 끊어 없애는 것을 열반이라 이름하지 아니하고 번뇌를 내지 아니하는 것을 열반이라 이름한다.
열반에는 사덕(四德)이 있으니 그것은 곧 상(常), 낙(樂), 아(我), 정(淨)을 말한다. 상이란 무엇인가. 인간들은 색신인 현상계의 끊임없는 생성 변화를 보고 무상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무상함에 집착하여 인간은 무상하다고 하며 허무한 생각을 갖게 되고 그 허무한 생각에 의해서 주관적인 결단으로 인한 대립과 투쟁을 일삼는다. 더구나 무상에는 연속적 “이음”이 없기 때문에 책임성이 없으며 찰라적 인생에 전적으로 자기를 내던지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상은 말함으로 변하지 않는 세계, 끊임없이 연속된 세계가 있으니 스스로 낳고, 죽음에 매어달려 허망하게 헤매지 말라는 것이다. 그 세계가 곧 법신세계로 항상 있는 것을 말한다.
낙이란 무엇인가? 모든 살고 죽는 것이 고라고 보는데 대하여 낙을 말한다. 우리 인생을 보더라도 확실히 태어남이 있고 죽음이 있다. 아무리 오래 산다해도 100세를 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언젠가 우리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고 그렇게 될 때 “나”란 고통 뿐이다. 낳고 병들고, 죽는 것은 확실히 고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은 삶의 면에서 보면 사라지기 때문에 죽음이지만, 죽음면에서 보면 그것은 생의 새로운 탄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데 한면만 보는데서 일어나는 착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고는 열반의 뜻으로 낙이 되는 것이다.
아란 무엇인가?  아란 중생들이 자아를 부정하고 나를 믿지 못하고 버리고 있기 때문에 아라 말하고 그것이 곧 불이다. 겉으로 나타난 모습은 가지각색의 중생이지만 그 껍데기를 벗기고 보면 불이다. 생명심의 번뇌, 망상이 사라지면 그것은 영원한 나이요 부처이다.
정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자기 속단의 늪속에서 언제나 더럽고 탁하다고 본다. 그러나 본성은 더럽지도 않고 개끗하지도 않다. 그러나 깨끗하다고 말하고 그것은 법의 뜻이다. 법이란 더러운 것이 아니다.
열반은 곧 부처성품을 봄으로써 얻는 것이다. 올바른 깨달음이란 곧 무상, 고, 무아, 부정이라는 착각을 버리고 진정한 상, 낙, 아, 정을 얻음에 있다. 물론 이때 상, 낙, 아, 정을 관념적으로 집착하면 그것은 이미 상, 낙, 아, 정이 아니다.
무상을 지향하여 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대비행을 닦아야 하고 고를 없애고 낙을 얻기 위해서는 삼매행을 닦아야 하며 무아에서 아를 얻기 위하여서는 반야를 닦아야 하고 부정에서 정을 얻기 위해서는 신심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결코 해탈은 모두를 놓고 떠남이 아니다. 그 떠남애서 다시 돌아와 진정한 나와 세계를 보는 것이다. 해탈은 포기가 아니라 다시 재생함이다. 열반은 죽음이 아니라 삶의 이면이다.

 

올바른 실천
이렇게 볼 때 우리의 믿음은 과연 올바른 것이었던가 하는 점을 다시 반성하게 된다. 우리는 열반 즉 해탈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 마음의 적멸을 얻으라 했고 그 마음의 적멸은 곧 삼매와 반야와 신심과 대비행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반야나, 삼매, 신심, 대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그것은 구제적인 현실에서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이러한 것은 동과 정에서 다같이 닦아야 하는데 구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은 없는가?

우리는 이제까지 불교를 관념적으로 생각해 온 과오는 없지 않은가? 불교는 결코 관념적이 아니다. 하나 하나가 전체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전체는 하나하나 속에 포용되어 대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나가  이루어 지면 전체가 살아나고 전체가 살아나면 하나하나가 그 개성을 살려 원음을 낸다. 그러한 실천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이 곧 보현보살의 행원이다. 모든 중생을 부처로 보는 것이다.

 

우리는 말한다. 겉으로 나타난 모습이 중생인데 그것을 어떻게 부처로 보는가? 그렇다. 만약 이 세상에 모두가 처음부터 부처로서 보아 하나로 본다면 무엇 때문에 나와 너의 구별이 있었을 것이며 세상이 존재해 있었을 것인가? 겉모양이 다르기에 부처가 있는 것이요. 세계가 있게 되는 것이다.겉모양은 모두 다른 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겉모양이 진정한 개아(個我)로서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본성이 부처임이 드러나야 한다.

겉모양을 보고 그 겉모양에 집착하지 말고 그 본성이 부처임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겉모양이 탐내고, 미워하고, 어리석으면 그것이 중생이고 그것은 겉 겁데기로서 언젠가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야 하고, 그 껍질에 매달려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껍질이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것이 곧 모든 중생을 부처로 보고 예배하고 공경하는 길이다. 모든 부처를 예배하고 공경하라고 할 대 살인하고 폭행안 사람에게도 예배하고 공경하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사람에게도 예배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그 죄를 깨우치게 하고 참회하게 하는 것이 곧 그에 대한 공경, 예배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 속에서는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이미 예배, 공경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찬탄하는 것이다. 이때의 찬탄도 역시 그의 불성을 찬찬하는 것이다. 잘못된 점은 보지 않고 잘한 일만 보고 그것을 찬탄하는 것이다. 참회와 공양, 항상 중생을 수순하고 마침내 호양하는 것이 올바른 실천이다. 모든 중생을 부모와 같이 공경하며 스승이나 아라한이나 내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이 받들되 병든 이에게는 어진 의원이 되고, 길잃은 이에게는 바른 길을 가리키고, 어두운 밤중에는 광명이 되고, 가난한 이에게는 보배를 얻게 하여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능히 중생을 수순하면 곧 모든 부처님을 수순하고 공양함이 되며 만약 중생을 존중히 받들어 섬기면 곧 여래를 존중히 받들어 섬김이 되며 만약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심이 나게 하면 곧 일체 여래로 하여금 환희하시게 함이다. 어찌한 까닭이냐 하면 모든 부처님은 대비심으로 체를 남기시는 까닭에 중생으로 인하여 대비심을 일으키고 대비로 인하여 보리심을 발하고 보리심으로 인하여 등정각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대비심을 일으켜 구체적으로 중생에게 수순하는 것이야말로 관념적 실천을 뛰어 넘는 행원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때 우리의 마음가짐은 형상을 떠냐야 한다. 형상인 아상(我相), 이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장(壽者相)을 떠날대 보리심이 일어나는 것이요, 그것으로 인하여 힘을 얻어 행원을하는 것이다. 실천의 길은 그밖에 보시, 계행, 정진, 인욕등 많은 길이 있지만 우리는보현행원의 길을 선택한다. 그것은 관념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사회화
종래 우리가 불교를 이해하는데 많은 오해가 있어왔다. 불교가 현실을 진단하는데 있어서 무상, 무아, 고를 말한다. 하여 불교를 마치 허무주의, 염세주의, 비관주의 등 부정적 어두운 그림자로 덮어 이해해 온 어떤 부분도 있어왔다. 거기에다 현실에 대한 적극적 개혁의 태도 결핍으로 은둔주의 패배주의로 착각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조선조의 억불숭유 정책과 교리적 비판으로 인하여 살아 남기 위한 생존의 절박한 상황에서의 타협과 무비판이 어용으로 불리고, 또한 인륜을 무시한다는 허무멸정자로 매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불교적 삶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일방적이고 부분적 시각으로 불교를 전체적으로 조작하려는 무지에서, 또한 무조건 불교를 억압하기 우한 인위적인 의도에 의한 왜곡에 지나지 않는 작태이다.

불교가 보는 현실은 허망하고, 모순에 가득찬 망상과 의혹의 덩어리로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의 본 바탕은 언제나 변함없고, 깨긋하고 맑은 진리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현실은 허망한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것을 걷어 내야 하고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겉으로 나타난 모습은 그것이 공심으로 들어나지 않는 한 개화되어야 하고 비판되어야 한다.

불성이 들아나지 않는 현실은 절복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절복은 미움이나 사심에 의함이 아니고 대비심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론을 통하여 전개되어야 한다.. 불교의 해인, 실천이 마음의 청정자리에 돌아가기 위해 탐, 진, 치, 삼독을 계(戒), 정(定), 혜(慧) 삼학으로 전환시켜 일심으로 환귀하는 데 있음을 다 잘 안다.

그리고 그 일심의 내용을 현실의 사회생활에서 전개하는데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일심의 내용을 적멸로만 이해하여 고요함의 상태만 지속하려는 경향이 있어 왔다. 그러나 적멸은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다.

언제나 번뇌와 망상과 일심이 역동적 관계에서 부단히 긴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심은 정지가 아니라 바로 현실의 부정적면인 담, 진, 치 세가지로 일어나는 부정과 부패와 비리와 불합리에 대하여 중생의 차별상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 과감히 대비(大悲)의 칼을 뽑아 절복시키는 정의의 빛이다. 그때 “나”라는 개체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청정한 마음을 떠나 다른 불국토가 없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고통받고, 억압받는 사람들도 나와 하나이다. 억압하고 고통을 주는 사람도 나와 하나이다. 이 둘을 화정(和淨)하는 것이 일심이다. 부정하는 그곳에 반야의 지혜가 있다. 여기에 동체대비의 보살이 있는 것이요, 이 보살을 통하여 불국토가 건립되는 것이다.
불교의 불국토는 결코 관념적인 데서 건립되는 것이아니요, 일념의 실천과 수행에서 건립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천리길도 한 발자국부터 시작되는 것이요,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하듯이 마음이 미혹한 사람은 마음을 밝게 하는 데서 참다운 길을 갈 수 있다. 철저한 수행의 생활이 받침되지 않는 한 불교는 관념의 유희에 지나지 않고, 현학자들의 말놀음만 증장시킬 뿐이다. 현실과 이상,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닌(不二) 삶을 위해 행원을 실천해야 한다.

불교는 말에 있지 않고 행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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